539. 유혹(1)
(1666) 유혹-1
조철봉이 청도 공장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쯤 지난 후였다.
평소처럼 조철봉의 도착 시간에 맞춰 일정표가 만들어졌는데 오후 3시부터 간부 회의였다.
청도 공장 사장은 전문경영인으로 조철봉한테서 전권을 위임받아 관리했지만
한달에 한번은 업무보고 형식으로 현황 브리핑을 하는 것이다.
회의실의 상석에 앉은 조철봉이 50여명의 간부들을 훑어보다가 문득 긴장했다.
유지선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지선은 옆모습을 보인 채 서류를 읽는 시늉을 했다.
단정한 모습이었고 유니폼을 입은 분위기도 산뜻했다.
사장 박재규가 브리핑을 시작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조철봉이 긴 설명은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박재규는 정리된 요점만 발표했다.
청도 공장의 상반기 수지 결산은 목표대비 25%나 초과 이익을 냈다.
따라서 박재규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찼고 간부들의 표정도 생기를 띠고 있었다.
브리핑이 끝났을 때 조철봉은 준비해온 내용을 2분쯤 말했다.
조철봉의 발언은 3분을 넘은 적이 없다.
회의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조철봉에게 박재규가 따라와 말했다.
“청도 시장 면담에 영업5부장으로 새로 온 유지선씨를 통역으로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박재규가 말을 이었다.
“유 부장은 중국어가 유창하다고 소문이 난 데다 베이징자동차 부사장이
소음기 주문을 늘린다고 해서요.”
소음기도 영업5부의 영업품목 중 하나인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 사람 일 잘 합니까?”
“예, 유능합니다. 영업 전문가 수준이더군요.”
박재규가 금방 대답했다.
유지선이 최갑중의 면담을 통해 영입되었지만
박재규쯤 되면 배경을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철봉의 추천으로 입사했다고 해도
박재규의 칭찬은 과장된 것 같지 않았다.
“다행이군요.”
조철봉이 말하자 박재규의 칭찬이 이어졌다.
“적응이 빠릅니다. 팀원 장악력도 뛰어난 것 같습니다.
물론 실적은 두고봐야겠습니다만.”
박재규의 열기가 전해져서 조철봉도 하마터면
유지선이 와이프 친구라고 실토하려다가 말았다.
오후 2시가 되었을 때 조철봉은 청도 시내를 달리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조철봉의 옆에는 오성자동차 청도공장 사장인 박재규가 앉았고
운전사 옆에는 유지선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조철봉과 유지선은 청도 시장을 만날 때까지
인사만 나누었을 뿐 한마디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 계속 박재규하고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그것이 자연스럽기도 했다.
청도 시장은 40대 중반쯤의 사내로 이른바 신세대 주자였다.
반갑게 조철봉을 맞은 그는 한·중 경제협력으로 인한 양국의 이익을 설파했는데
조철봉은 조금 감동했다.
청도 시장 왕찬의 중국어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유지선의 통역이 유창했기 때문이다.
지선의 통역은 알아듣기 쉬운데다 단어 설정이 자연스러워서 금방 이해가 갔다.
모르긴 해도 왕찬의 말은 지선이 옮긴 내용보다 거칠고 부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이제 조철봉이 중국 당국의 협조에 대한 인사를 했는데 왕찬의 표정도 부드럽게
다듬어진 것이 분명했다.
조철봉은 지선의 입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그러자 갑자기 목이 메었다.
(1667) 유혹-2
청도시장 면담에 동석한 베이징 자동차 부사장과의 대화는 더 자연스러웠다.
오늘은 양국 간 경제협력 강화를 위한 의례적인 자리였지만 유지선은
베이징 자동차 부사장 동보성과 상담 일자까지 잡아놓았다.
그래서 면담을 마치고 차에 올랐을 때 조철봉이 마침내 유지선에게 대놓고 칭찬을 했다.
“유 부장, 잘했어요. 통역 내용이야 알 수 없었지만 성과는 눈에 보입니다.”
“과찬이세요.”
금방 얼굴이 붉어진 유지선이 뒷자리의 조철봉을 향해 반쯤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칭찬 감사합니다.”
“적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장 박재규가 거들었다.
“통역의 단어 구사 능력에 따라서 내용 전달에 크게 차이가 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다음 달의 청도공장 인사에서 유지선은 부장대리 딱지를 뗄 것이다.
유지선은 머리를 뒤로 묶어 올려서 뒷목이 다 드러났다.
머리카락이 몇 올 흘러내렸지만 미끈한 목을 본 순간 조철봉의 심장이 다시 출렁거렸다.
그러나 외면한 조철봉은 소리죽여 길게 숨을 뱉었다.
유지선은 와이프 이은지의 친구인 것이다.
이은지를 배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 파탄이 된다.
전에는 대책도 없이 일부터 저지르고 보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언제부터인가 앞뒤를 재고 시작부터 절제를 해온 것이다.
그날 저녁 조철봉은 공장 간부들과 식사를 하고 나서 바로 숙소인 호텔로 돌아왔다.
최갑중과 동행이었다면 당연히 룸살롱에 갔을 것이다.
조철봉처럼 즐기려고 룸살롱에 가는 부류는 부담 없는 동행을 선호하는 것이 당연하다.
박재규 등 공장 간부들과 어울린다면 이쪽에서 분위기를 맞추려고 오히려 무진장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밤 10시 반쯤 되었을 때 조철봉은 전화를 받았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 차림으로 TV를 보는 중이었다.
“아, 예.”
당연히 한국어로 응대했을 때 저쪽에서 3초쯤 가만있더니 말했다.
“사장님, 쉬고 계세요?”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유지선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이 여자 봐라’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입술 끝이 비틀렸다.
그러나 가슴은 세차게 뛰었고 입 안이 금방 말랐다.
“아, 그런데요.”
그렇게 대답했다가 너무 딱딱한 응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얼른 말을 이었다.
이것은 본능적 대응이어서 생각하고 자시고 하지 못했다.
“이거 놀랐는데, 이 시간에 유 부장이 전화를 다 해주시고 말요.”
“너무 늦었나요?”
다시 유지선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손부터 흔들었다.
“아니, 천만에. 난 이제야 샤워하고 나왔어요. 나한테는 이른 시간이지.”
“혼자 계세요?”
그때 다시 ‘이 여자 봐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아, 그럼 당연히 혼자죠.”
“저, 지금 아래층 로비에 있는데요.”
그 순간 조철봉은 다시 숨을 멈췄다.
그러나 이은지에 대한 배신이나 가정 파탄 따위의 생각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이쪽에서 접근할 때를 가정하고 한 생각이다.
저쪽이 다가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가 풀었다.
그 망설이는 시간이 3초쯤 되었는데 그동안 이은지와 가정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마침내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올라와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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