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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인물 1

오늘의 쉼터 2014. 9. 17. 17:08

제20장 인물 1 

 

 

부여헌을 잃고 한동안 실의에 빠져 군국사무 일체를 내신좌평 개보에게 떠맡긴 채

 

국사를 돌보지 않던 장왕에게 하루는 족친 자격으로 부여사걸이 알현을 청하였다.

 

다른 사람만 같았어도 만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사걸은 왕실의 사람이라

 

왕은 마지못해 허락하고 그를 내전에서 우어하였다.

 

장례를 치른 뒤에 굴안과 망지는 물론 새로 얻은 남역 방비를 맡아 지리산으로 떠나 있던

 

흑치사차까지 조의를 표하러 대궐을 다녀간 적이 있어 이번에도 역시 그런 차원이려니 싶었다.

 

부여헌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를 따라 내지로 들어온 족친 장수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오, 족숙공이시오!”

아우를 잃은 뒤로 외로움과 무상감에 빠져 지내던 장왕은 어느 때보다 반갑게 사걸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사걸이 왕을 알현코자 한 까닭은 이전의 족친 장수들과는 격이 달랐다.

 

성격이 급한 사걸은 거두절미하고 대뜸 왕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신 등이 이역만리 담로지를 찾아온 부여헌을 따라 대왕 폐하의 왕업을 보필코자

 

귀국한 지가 어언 20년이 넘었습니다.

 

그사이에 영명하신 대왕께서는 난정을 바로잡아 초근목피를 씹던 백성들은 끼니마다

 

쌀밥을 배불리 먹게 되었고,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군사를 훈련하고 원적들을 무찔러

 

전조의 구토를 많이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오나 세월은 무상하여 폐하의 청청하던 용안에는

 

어느덧 주름이 깊이 패였으며, 신 등의 검고 성성하던 수발도 어느새 황락하여 반백이 되었습니다.

 

또한 귀국선에 탔던 다섯 사람 중 부여청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굴안 장군도 지난 갑신년 싸움에서

 

얻은 부상으로 기력이 전만 같지 아니합니다.

 

더욱이 이제는 우리를 데려왔던 부여헌마저 세상을 버렸으니

 

어찌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사걸의 음성은 차츰 고조되었다.

“본래 국운의 흥망성쇠는 질풍노도와 같은 법이라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하고 신라는 쇠하였으니 어찌 촌각인들 머뭇거리겠습니까.

 

하물며 신라의 관산성(옥천)으로 말하면 조대왕(성왕)께서 붕어하신 원통한 곳으로

 

이곳을 얻지 않고는 후손의 도리를 논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지난날을 상고하건대 신라가 한때 흥한 것은 바로 이 관산성을 얻음으로써

 

한산과 당항성을 장악하고 그로 말미암아 중국으로 통하는 뱃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관산성은 중부 권역의 패권을 결정짓는 요새 중의 상요새올시다.

 

폐하께서 계림 토벌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관산성을 되찾는 일이 시급합니다!”

사걸의 진언을 듣자 장왕의 얼굴에선 돌연 생기가 돌았다.

“족숙공의 말씀이 과인의 뜻과 한 치도 다름이 없소.

 

과인 또한 어찌 관산성의 일을 잠신들 잊을 리 있겠소.

 

모산성과 낭성을 친 까닭도 실은 관산성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나 다만 아우를 잃고 비통한 나머지

 

잠시 경황이 없었을 뿐이오.”

“신이 벌써 며칠째 꿈자리가 사납고 어지러운데,

 

간밤에는 신의 아비가 긴 작대기를 들고 나타나 무턱대고 신의 몸을 마구 때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신이 남령을 떠나올 적에 신의 아비는 특히 관산성의 일을 말하며 반드시 조대왕의 원수를 갚으라고

 

신신당부하였거니와, 신이 아직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그를 책망하는 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관산성을 치신다면 그 선봉은 필히 신에게 맡겨주십시오.”

사걸의 말에 장왕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남공은 본국의 장래와 부여 왕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른 분이셨을 뿐 아니라

 

성대왕께서 생전에 특별히 귀애하신 서자라 들었소.

 

능히 꿈에 나타나 화를 낼 만하니 조만간 군사를 일으킬 때는 반드시 족숙공의 말씀과 같이 하리다.”

왕은 그때부터 다시 백관들의 문안을 받고 밀쳐두었던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이연이 물러나고 이세민이 새 황제로 등극한 당나라에 조공사를 파견한 뒤

 

이듬해인 정해년(627년) 7월,

 

탑전에서 백관들을 불러놓고 마침내 신라와 국운을 건 한판 결전을 선포하였다.

“여태까지 짐은 신라의 허실을 정확히 알 수 없어 군사를 내고 계책을 쓰면서도 의심하고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이 해왔으나 이제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음이 명백해졌다.

 

지난 4, 5년간 우리는 거의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접경의 성과 땅을 빼앗았지만

 

저들은 이렇다 할 반격을 해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신라는 전날의 신라가 결코 아니다.

 

신라에는 계책을 낼만 한 책사도 없고, 군사를 부릴 장수도 없으며,

 

다만 늙은 왕을 보필하는 문약한 신하와 겁쟁이 졸개들이 있을 뿐이다.

 

이때 신라를 쳐서 토벌하지 않는다면 언제 다시 때를 얻을 것인가!”

이어 장왕은 계책을 내었다. 먼저 부여사걸에게 3천의 군사를 주고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한 뒤 곧바로 상주로 진격할 것을 명하였다.

 

관산성은 천애의 협곡을 낀 장대한 석성(石城)으로 신라가 그곳을 얻었기에

 

가야제국을 병탄할 수 있었다는 말이 나돌 만큼 요긴한 곳이며,

 

북편의 삼년산성(보은)과 더불어 중부 권역의 가장 큰 모성(母城)이었다.

 

제아무리 용맹스런 사걸일지언정 그런 곳을 치는 데 고작 3천의 군사를 데려가라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에 낭성을 치는 데도 4천 5백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낭성이 조약돌이라면 관산성은 거대한 바윗돌입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1만의 군사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이까?”

사걸이 반문하자 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군사를 많이 데려가면 오히려 형세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3천의 군사로도 충분하니 사걸은 과히 염려하지 말라. 짐에게 따로 계책이 있다.”

그리고 왕은 탑전에 모인 문무 백관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그사이에 짐은 곰나루의 옛궁에 주둔하며 국원과 한산으로 동시에 군사를 낼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잃어버린 구토를 모두 되찾으리라!”

말을 마치자 장왕은 스스로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말에 올랐다.

 

임금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장으로 향한 것은 관산성에서 전사한 성왕 이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연히 백제군의 사기는 천지를 송두리째 집어삼킬 듯 크게 진작되었다.

3천 정병을 이끌고 계룡산을 우회하여 동진한 사걸은 진현현(眞峴縣:대전 근교)의 동방 접경에서

 

관산성의 두 자성(子城)을 만났다.

 

관산성을 치자면 먼저 두 자성을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걸은 군사를 두 패로 나누고 전광석화와도 같은 발빠른 공격을 감행하여 저항하는

 

자성의 적군을 불과 사흘 만에 모조리 격퇴시켰다.

 

그는 함락된 자성 안의 백성 3백여 명을 사로잡은 뒤 곧장 관산성으로 진격해

 

웅장한 성곽을 마주하고 대치하였다.

소식에 접한 일선주 군주 석품은 급히 주군(州軍)을 소집하여 관산성으로 달려가려 하였다.

 

그런데 삼년산성을 비롯한 접경의 다른 외성에서도 백제군의 동향이 수상하다는 급보가

 

잇따르는가 하면 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웅진에 주둔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석품은 출정하려던 것을 잠시 미루고 관산성에서 원군을 청하러 달려온 군사에게 물었다.

“이는 간교한 부여장이 관산성으로 우리를 유인하고 기실은 다른 곳으로 대군을 내려는 수작이다.

 

성 앞에 대치한 적군의 숫자가 얼마쯤 된다고 하더냐?”

“눈에 보이는 숫자는 3천여 기쯤 되는 듯했으나 뒤로 얼마가 더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석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봐라. 유인책이 아니고서야 어찌 3천의 군사로 관산성을 넘본단 말이냐?

 

하마터면 큰일날 뻔하였다.”

그는 입었던 갑옷을 도로 벗으며 말했다.

“비록 자성이 함락되었더라도 관산성만 견고하면 그만이다.

 

성중의 군사가 적지 않으니 너는 성주에게 가서 방비를 철저히 하고 기다리라 일러라.

 

십중팔구 원군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석품은 함부로 원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사정은 한산주와 국원 소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왕이 친히 웅진에까지 이르렀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라의 군주들은 제가 맡은 접경을 방비하는 데 급급하여 어느 곳으로도 쉽게 원군을 내지 못했다.

 

그사이에 낭성의 흥수가 휘하의 1천 군사를 이끌고 북향하여 재빨리 괴양군(槐壤郡:괴산)을

 

장악하였고, 달솔 백기와 망지는 모산성을 근거로 만노군과 흑양군(黑壤郡:진천 부근)을 공략하여

 

속현 세 곳을 빼앗으며 국원을 압박해 들어갔다.

 

백제군은 이르는 곳마다 기세를 올리며 위용을 떨쳤지만 신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위급함에 빠진 금성에서는 사신을 급히 당나라로 보내어 백제가 침공한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런데 신라 사신이 탄 배가 당성항을 출발하는 것이 서해에 나와 있던 백제 수군들의 눈에 띄고 말았다.

 

이 소식은 곧 웅진에 주둔한 장왕의 귀에 들어갔다.

“당에서 이 사실을 알고 간섭이라도 하고 나선다면 공연히 일이 시끄러워질 공산이 크다.

 

시급히 신라 관선을 뒤쫓아 사신을 죽이고 배를 침몰시키도록 하라!”

장왕이 부랴부랴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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