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0장 인물 2

오늘의 쉼터 2014. 9. 20. 18:18

제20장 인물 2 

 

 

 

 

“오, 이는 짐의 불찰이다. 내 어찌 서해를 봉쇄하지 않았더란 말인가!”

왕은 좌평 개보와 해수를 불러 대책을 강구하였다.

“지금 우리 군사들은 이르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이대로 가면 구토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물론이요,

 

적의 소경을 수중에 넣고 금성까지 넘볼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설혹 당에서 알고 간섭을 한다 해도 무시하면 그뿐이요,

 

나중에 따로 사람을 보내어 조공을 충실히 한다면 얼마든지 무마할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해수의 말에 개보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 등극한 당황제 이세민은 나이가 젊고 혈기가 방장하며

 

형과 아우를 한꺼번에 죽일 만치 두려움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이제 막 보위에 등극하였으므로 가장 먼저 주변국에 권위와 위엄을 세우려 할 게 뻔합니다.

 

그러므로 기왕 사신을 보내자면 지금 보내는 편이 한결 유리합니다.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명분 없는 침공이 아니라 전날 신라에 빼앗긴 구토를 수복하자는 것이니

 

이런 사정을 소상히 밝힌다면 사전에 당나라의 양해를 얻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수나라 구토를 회복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온 그가 설마 막무가내로 나오기야 하겠습니까?”

장왕은 개보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먼저 장안에 도착할 신라 사신의 말을 반박하고 이쪽의 불가피한 사정을 역설하여

 

이세민의 양해를 구하자면 과연 누구를 세객(說客)으로 삼아야 할지 난감했다.

 

죽은 부여헌의 존재가 새삼 그립고 절실한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이럴 때 헌이 살아 곁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으랴!”

왕은 눈물을 글썽이며 탄식했다. 그때 개보가 말했다.

“용은 용을 낳고 봉은 봉을 낳는 법이라 했습니다.

 

복신은 헌공의 재주를 닮아 사려가 깊고 언변이 출중할 뿐 아니라

 

갖가지 무술을 몸에 익힐 만큼 신체 또한 강건합니다.

 

헌공이 할 일을 능히 맡아 해낼 것입니다. 게다가 신라에서는 지난번 우리나라에

 

조위사로 다녀간 김춘추가 오래 당에 숙위하며 양국의 교분을 철벽같이 다져놓았다고 들었습니다.

 

김춘추로 말하면 백정왕의 외손이니 사신의 격으로 논하더라도 복신만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그래, 복신이 있었지! 내가 어찌하여 복신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구나!”

장왕은 무릎을 치며 당장 사람을 사비로 보내 복신을 데려오라 하였다.

복신이 왕명을 받고 웅진성에 이르자 왕은 당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친히 차근차근 설명하고 나서,

“네가 너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신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니 복신이 허리를 굽혀 두 번 절한 뒤에,

“대왕께서 어린 저를 믿고 중책을 맡겨주시니 가슴이 벅찰 따름입니다.

 

신명을 바쳐 하명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고 오겠습니다.”

하는데 그 언행이며 태도가 약관의 젊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치 의젓한 데가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복신을 조공사로 책봉한 뒤 당황제에게 바칠 방물을 서둘러 준비하는

 

한편 선부에 말하여 튼튼한 배를 마련하라 이르고 장수 둘과 20여 명의 군사에게

 

복 신을 호위토록 하였다.

이렇게 백제를 떠난 복신이 당나라를 다녀온 것은 8월 하순경이었다.

장왕은 복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옛궁의 궁문 앞에까지 나와 친히 조카를 맞았다.

 

주악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왕이 조카의 손을 다정히 잡은 채 어전에 이르니

 

복신이 갑자기 땅에 엎드려 떨리 는 목소리로 말하기를,

“신이 폐하의 태산 같은 성은을 입어 무사히 장안을 다녀왔으나 얼마 전까지 당에 숙위했던

 

신라의 김춘추가 워낙 당황제와 친분이 두터웠고, 당조의 군신들과 농담을 지껄일 만치

 

가깝게 지냈다 하므로 초행인 저로서는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나이다.

 

신이 아비의 이름을 팔아 가까스로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지만 그는 신이 구토 회복을 역설하는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인국(隣國) 간에 화평하여 지내라는 얘기만 남겼습니다.”

말을 마치자 지니고 온 이세민의 글을 전하였다.

 

왕이 받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왕은 대대로 동쪽 변방을 지키는 군주로 먼바다의 한 끝에서 바람과 파도가 험한 것을 무릅쓰고

 

지극한 충성으로 조공을 바치니 이 어찌 아름답고 기쁜 일이 아니겠소.

 

짐은 천명을 받고 천하의 임금이 되었으니 정도를 널리 펴고, 백성들을 애육하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과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라오.

 

신라왕은 짐의 번신(藩臣)이며 왕의 인국인데, 백제국이 늘 군사를 파견하여 정벌을 꾀함으로써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고 들었소.

 

군대의 힘을 믿고 잔인한 싸움을 하는 것은 짐의 원하는 바가 아니오.

 

나는 이미 왕질 복신과 고구려 및 신라 사신들을 두루 대하여 삼국이 서로 통호하고

 

모두 화목하게 지낼 것을 자세히 타일렀거니와, 왕은 반드시 전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참뜻을 헤아려 즉시 군사를 거두고 이웃간의 정을 돈독히 하기 바라오.

글을 미처 다 아니 읽어 왕은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고 서신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끓어오르는 노여움을 애써 억누르려는 듯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민망함과 죄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복신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모두가 신의 불초하고 용렬한 탓이올습니다!”

그제야 왕은 감았던 눈을 떴다.

“복신은 너무 상심하지 말라. 이것은 너와는 하등 무관한 일이다.”

왕은 사뭇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조카 복신을 다독거렸다.

 

그런 다음 개보를 불러 이세민이 글로써 말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음인지 뜻밖인 표정을 짓고 한참 고민에 잠겼던

 

개보가 조심스럽게 용안을 쳐다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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