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3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쎄다, 공의 생각에는 어찌하면 좋겠는가?”
“고구려를 막자면 당나라의 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당과 척을 지고는 아무래도 득보다 실이 많지 않겠나이까?”
“……그렇겠지.”
왕은 개운 찮은 듯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별안간 들고 있던 서찰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으로
이세민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감히 이따위 무례하고 건방진 문투로 글을 짓다니,
이건 상전이 종놈에게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이세민이란 자가 불효불충하고 매사에 볼강스러운 데가 있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어린놈이 아비를 쫓아내고 보위에 올라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원통했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당의 요구에 따르는 척하는 것이 국익에 유리하다는 것을 정세에 밝은 장왕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군사를 거두었다.
그러나 백제는 임금까지 출정한 정해년의 싸움에서 북방의 한산을 제외한 전성기 때의 구토를
거의 수복했을 만큼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왕은 흥수를 비롯한 몇몇 공신들을 불러 크게 치하하고 수복한 땅에 성곽과 방책을 세우는 일을
친히 감독한 뒤 그해 9월 하순, 백관들을 거느리고 다시 사비성으로 돌아왔다.
귀경한 왕은 조카 복신을 불렀다.
“너는 당나라로 가서 짐이 당황제의 글을 받고 즉시 군사를 거두어 환궁한 것을 자세히 말하라.
그리고 되도록 당에 숙위하며 조정의 중신들을 깊이 사귀도록 하라.
그리하면 훗날 반드시 크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
복신이 왕명을 받고 당나라로 떠나자 왕은 탑전에 중신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짐이 환궁한 것은 당의 요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니
이를 어찌 진심이라 할 것인가. 과인의 한결같은 뜻이 신라를 쳐서 아우르는 데 있음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사비는 서남으로 너무 치우쳐 접경의 동태를 잘 파악할 수 없고,
소식이 오가는 데도 쓸데없이 시일과 인력을 낭비하는 결점이 있다.
이제 짐은 당분간 사비를 떠나 웅진으로 거동하여 지내려 하거니와 한솔 이하 문관들은
이곳에 남아 예전처럼 국사를 돌볼 것이지만 무관들은 처첩을 데리고 짐을 따르라.
언제 다시 돌아올지는 지금 말할 수 없으나 수년은 족히 걸릴 것이므로 그리 알아서들 채비를 하라.”
백제가 곰나루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것은 성왕 재위 16년(538년)의 일이다.
그때 성왕은 고구려의 거듭된 침략과 신라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사비로 피난 겸 도읍을 옮긴 것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90년 만에 장왕은 조정의 백관들을 거느리고 사비를 떠나 다시금
옛 서울 웅진에 주둔할 뜻을 밝히니 이는 수세에 몰렸던 백제가 드디어 공세로 돌아섰다는 뜻이요,
그럴 만큼 백제의 국력이 크게 강성해졌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정해년 10월, 장왕은 마침내 왕비와 왕자,
왕녀들을 데리고 웅진으로 행차하여 더욱 극렬한 기세로 남역 평정과 신라 토벌을 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잖아도 해마다 계속되는 백제의 집요한 맹공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껴온 신라로서는
또 한번 대경실색할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여 다시 대군을 낼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 무렵,
내성사신 용춘은 백정왕의 묵인 아래 상악의 장안사로 가서 몰래 비구니 덕만 공주를 만났다.
덕만은 숙부를 보는 예로 용춘을 대하고 이어 아우 천명과 춘추의 안부를 물었다.
어려서는 곧잘 덕만의 머리도 쓰다듬곤 했었지만 이젠 그럴 형편이 아니라
용춘도 존댓말을 썼다.
인사가 끝나고 나자 용춘은 신라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섰음을 여러 가지 예로 설명한 뒤
덕만과 같은 지혜로운 이가 왕실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하의 춘추 이미 팔순에 가깝습니다.
근자에는 어제 잃은 성곽의 이름도 오늘 잊어버리시고,
조석으로 대하는 신하들의 면면도 다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총이 이러할진대 정세는 하루가 달리 위태롭고 급박하니
공주께서는 부디 환속하시어 사직을 보좌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거듭되는 용춘의 간곡한 말에도 좀체 대꾸가 없던 덕만이 한참 만에 허공을 바라보며 깊이 탄식했다.
“심산유곡에 처해 있다고 어찌 나라의 위급함을 모르겠습니까?
저 역시 나랏일을 걱정하느라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덕만은 용춘을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백반 숙부는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환속한다면 왕실마저 어지러워질 게 뻔하니 오히려 나라에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용춘은 마음속에 담아가지고 온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또한 어찌 그 일을 생각하지 않았겠소.
하나 다음 보위는 반드시 공주께서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이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대삽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왕위가 넘어가면 신라의 사직이 망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명백합니다.”
용춘의 말에 덕만은 몹시 놀랐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답게 차분함을 잃지 않고 반문했다.
“나라에 여자로 보위를 이은 전례가 없지 않습니까?
반대하는 조정 중신들이 적지 않을 터인데 당숙께서는 과연 어떤 대책을 갖고
그런 말씀을 입에 담으시는지요?”
본래 신라에는 3성(三姓:朴氏·昔氏·金氏)에서 비롯된 성골이 귀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왕족과 왕족간의 근친혼이 아니면 품계를 유지하지 못해 진골로 전락하였으므로
7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 자연히 그 수가 격감하였고,
특히 미추왕(味鄒王:신라 13대 임금, 김씨 왕조의 시조) 이후로는 왕실이 4백 년 가까이 김씨로만
내려와서 이때에 이르러 성골은 남녀노소를 모두 합해야 10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 성씨도 김씨 하나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용춘은 바로 그 점에 착안하여 공주 덕만을 여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백반이 후사를 생각할 때 내심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성골을 꼽자면 나라를 통틀어
모두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저와 춘추는 이미 진골로 품계를 낮추었으니
이제 남은 사람으론 공주와 을제공이 있을 뿐입니다.
공주께서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어질고 지혜가 뛰어나서 만일 남자로 태어났다면
임금의 재목으로 손색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를 알아차린 백반이 미리 화근을 없애고자 그 처까지 동원하여 공주께 불법을 가르쳤고,
결국은 대궐을 떠나 비구니로 살도록 유혹한 일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올시다.”
용춘은 잠시 말허리를 끊었으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