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 협력(12)
(1638) 협력-23
“어서 오십시오.”
자리에서 일어선 몰로토프가 조철봉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둥근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다. 인사를 마친 그들은 원탁 주위에 둘러앉았다.
몰로토프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방안에는 통역 안길수까지 넷이 모였다.
몰로토프는 혈색 좋은 얼굴에 대머리였다.
4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약간 살찐 체격이었지만 옷 맵시가 좋았고 인상도 부드러웠다.
원탁에는 이미 술과 안주가 놓여 있었으므로 몰로토프가 먼저 조철봉의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남북한이 연합했더군요. 보기 좋습니다.”
웃음 띤 얼굴로 몰로토프가 말하더니 힐끗 티모센코에게 시선을 주고 나서 말을 이었다.
“러시아에서 티모센코씨까지 불러들여 저하고 연결작업을 부탁한 걸 보면 중·일 컨소시엄의
물량 공세에 밀리는 모양이지요?”
안길수의 통역을 들은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남북한만으로 승산이 보인다면 어렵게 티모센코까지 시켜 이런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남북한과 러시아가 연합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내놓을 조건은요?”
바로 몰로토프가 그렇게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물론이고 티모센코까지 긴장했다.
“먼저 공급권을 획득하려고 러시아가 준비해온 조건을 듣고 싶습니다.”
조철봉이 말하자 통역을 들은 몰로토프가 싱긋 웃었다.
“우리 조건을 남북한의 조건에다 추가하면 가능할까요?”
“듣고 싶습니다.”
정색한 조철봉이 몰로토프를 보았다.
그러자 몰로토프가 심호흡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차관 15억불에다 해군력을 증강시켜주는 것이었지요.”
술잔을 든 몰로토프가 이맛살을 좁히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중·일의 조건이 대단하더군요.
차관 57억불, 무기 원조 55억불, 거기에다 공장 건설에 50억불….”
통역을 들은 조철봉이 몰로토프를 보았다.
러시아의 정보망 또한 그 어느 국가에도 뒤지지 않는 것이다.
몰로토프도 중·일이 제시한 조건을 알고 있는 상황이다.
조철봉이 몰로토프에게 물었다.
“남북한 연합에 러시아가 가담하시지 않겠습니까?”
조철봉이 정색하고 안길수의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몰로토프가 차분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시간이 급합니다. 내일 한국 경제사절단이 오고
곧 남북한, 러시아 연합의 조건을 제시해야 할 겁니다.”
통역을 맡은 안길수가 긴장한 때문인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똑바로 몰로토프를 보았다.
“난 한국 기업의 로비스트로 이곳에 왔다가 국가간 대형 프로젝트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난 이런 경험이 처음입니다.”
안길수가 열심히 통역했고 몰로토프는 눈만 껌벅였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이곳 관리들한테 몇백만불씩 뇌물을 먹이면 일이 끝나는 줄 알았지요.
난 그런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주는 건 아주 익숙하거든요.”
통역을 하면서 안길수가 처음으로 더듬거렸고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몰로토프가 이제는 긴장한듯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조철봉이 다시 말했다.
“러시아가 가담하면 난 3국 공용 로비스트가 되는 건가요?
내가 쥐고 있는 1천5백만불은 공용 로비자금이 되겠군요.”
(1639) 협력-24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안길수가 자꾸 힐끗거렸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는다.
티모센코는 몰로토프와 식당에 남았으므로 차 안에는 운전사까지 셋뿐이다.
차가 시내로 들어섰을 때 조철봉이 말했다.
“물론 대의도 좋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한다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도 많아. 남쪽에도.”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안길수를 보았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겠지.”
안길수는 눈만 크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말은 알아들었지만 의도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앞쪽에 시선을 둔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국가도 좋고 민족도 좋지만 배고프면 말짱 헛거야.”
“…….”
“사흘 굶고나서 담 안 넘는 놈 없다는 말도 있어. 이건 남한 말이야.”
“…….”
“난 지금 뇌물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안길수를 보았다.
차안에는 엔진음만 가볍게 울리고 있다.
안길수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난 뇌물 먹이는 선수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이번 일에 선발 된거야.
물론 민간기업 로비스트로 말이지.”
“…….”
“젠장, 누가 이렇게 국가간 작전에 휘말려들 줄 알았나?
아까 몰로토프한테 한 말도 사실이라고.”
안길수는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침까지 삼킨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뇌물은 말야.”
하고나서 조철봉이 눈을 치켜떴다.
“돌고 도는 거야. 돈처럼 돈다구.
그것이 빨리 돌수록 기름칠이 많이 된 것처럼 경제가 일어나지.
활성화라고 하지. 그런데 어떤 놈이 뇌물을 안받는다.”
말을 뚝 그친 조철봉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안길수를 노려본 채 조철봉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놈 때문에 잘 돌아가던 기계가 뚝 멈추게 될 수가 있어.
내 경험으로 보면 그런 놈은 꼭 무능력자, 독불장군, 또는 정신이 이상한 놈이었지.
뇌물은 물론 사회에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잘 쓰면 윤활유 역할이 되는거야.”
안길수의 표정이 그래서요? 하는 것 같았으므로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안길수에게 교육, 또는 납득시키려는 의도 따위는 없다.
아직도 북한 부대사 이용태한테 쩔쩔맸던 기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안길수를 쏘아보았다.
정말이지 제일 역겨운 인간은 위선자인 것이다.
겉으로는 전혀 안 그런 척 하면서 속으로 온갖 추잡한 짓을 다 저지르는 부류,
뇌물도 안 받는 척 하면서 뒤에서 악착같이 챙기는 놈이 결국 사고를 일으킨다.
“내가 몰로토프한테 비자금 1천5백만불이 있다고 말한 건 미끼였어. 아니, 떡밥을 뿌린 것이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사명감도 좋지만 떡밥이 널려 있다는 것을 알면 인간은 더 기운이 나는 법이야. 거긴 어때?”
불쑥 묻자 안길수가 당황했다. 얼굴도 금방 붉어졌다.
“저는 글쎄요.”
하고 안길수가 더듬거렸을 때 조철봉이 좌석에 등을 붙였다.
차는 호텔 근처로 다가가고 있었다.
“내일 몰로토프 부인하고 만나도록 주선을 해봐.
될 수 있으면 티모센코도 모르게. 나하고 안길수씨하고 둘이서만 말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입술 끝으로만 웃었다.
“몰로토프도 모르게. 물론 다 알고 있겠지만 시치미를 뗄 수 있도록 뇌물은 그렇게 주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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