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 협력(10)
(1634) 협력-19
“조까고 있네.”
대사관을 나와 짙은 어둠에 덮인 거리로 나왔을 때 조철봉이
마침내 목구멍 밖에까지 나와 있던 말을 뱉었다.
물론 옆에는 강성욱이 걷고 있다.
강성욱이 시선만 주었으므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시바, 누군 국가에 대한 사명감이 없는 줄 아나, 나아 참, 낯 간지러워서.”
“저기 차가 있습니다.”
강성욱이 손으로 거리 왼쪽을 가리켰다.
북한대사관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차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이쪽을 보았는지 미등을 켜더니 후진해 왔다.
“내가 장담을 하겠는데요.”
차가 멈춰 섰을 때 조철봉이 다시 말했다.
문을 연 강성욱이 시선을 주었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나하고 세 번만 더 만나면 북한 부대사는 돈 먹는 재미를 알게 될 겁니다.”
“타시죠.”
마침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은 강성욱이 조철봉을 먼저 태우고는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차가 출발했을 때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조 사장님, 기분 나쁘십니까?”
조철봉의 시선과 마주치자 강성욱은 활짝 웃었다.
그러나 소리 없는 웃음이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저는 우스워서 죽을 뻔했습니다.”
“아니 왜요?”
“잔뜩 긴장하고 계시는 것을 보니까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정색한 조철봉이 눈만 껌벅이자 강성욱은 마침내 픽 웃었다.
“조 사장님, 돈 먹이고 그런 충고를 받으신 건 처음이죠?”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의 조철봉을 보더니 강성욱이 다시 웃었다.
“한번 시도해 보세요. 부대사가 넘어가나 말이죠.”
마침내 조철봉의 얼굴에도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럼 내기할까요?”
좌석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물었다.
“부대사가 내 뇌물을 먹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백만원 내죠.”
“좋습니다.”
강성욱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는 수작인 줄 알고 있기도 했지만 말을 듣다보니
화만 낼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인간도 있구나 하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용태는 러시아 측 책임자 몰로토프를 끌어들이라는 중대한 업무를
조철봉에게 맡긴 것이다.
한국 측 실무 책임자인 강성욱도 이의가 없었으므로 조철봉은 남북한 양측이
인정한 공식 로비스트로 신분이 격상되었다.
“중·일의 조건이 어떻게 될지 조금 불안한데.”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강성욱이 혼잣소리를 했다.
오후 11시반, 곧 부총리의 비서실장 포이는 중·일의 조건을 김정산에게 알려줄 것이었다.
양국의 조건을 합하면 엄청난 물량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머리를 돌린 강성욱이 조철봉을 보았다. 거리는 차량 통행이 드물었으므로
차는 속력을 내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남북이 합동 작전을 펼친다는 것에 나는 더 보람을 느낍니다.”
조철봉은 가만 있었고 강성욱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뭐가 뭣인지 조철봉은 알쏭달쏭했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든든하긴 했다.
그것도 무척, 요즘 자주 써먹는 민족공조란 말도 언뜻 떠올랐다.
(1635) 협력-20
다음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뷔페로 아침을 먹는 조철봉의 앞쪽 자리에 30대 초반쯤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둥근 얼굴에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는데 김정산이 보내준 러시아어 통역이다.
사내는 이름이 안길수라고만 밝혔을 뿐 송기태 옆에 앉아 잠자코 식사를 했다.
호텔방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다고 믿는 터라 조철봉 일행은 입조심을 해왔다.
그러나 식당에서는 가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주위를 둘러본 조철봉이 안길수에게 물었다.
“몰로토프하고 만나기 전에 뜸을 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난 일면식도 없는 처지라 곤란하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
“지금 추진 중입니다.”
안길수가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러시아 대사관의 인맥을 통해서 몰로토프한테 접근할 계획입니다.”
“누가 말이오?”
“우리 측에 러시아통이 많습니다.”
그러더니 안길수가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저도 러시아 유학파거든요.”
“음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안길수의 시선을 받았다.
불쑥 어젯밤 북한 부대사 이용태한테서 받은 수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씀이야.”
조철봉의 시선이 안길수 옆에 앉은 송기태를 스치고 지나갔다.
송기태는 열심히 베이컨을 자르는 중이다.
“안 선생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조철봉이 묻자 안길수가 씹던 음식을 삼키고는 눈을 두어 번 껌벅였다.
“무엇을 말씀입니까?”
“한국의 경제.”
그래 놓고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그시 안길수를 보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1960년 이전의 한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아프리카 최빈국의 경제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40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철봉도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럴 때 꼭 민주화 이야기를 꺼내 김을 빼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잊은 사실이 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열심히 일만 하던 사람들,
즉 산업 일꾼들과 민주화 투사들이 모두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일하는 사람들은 나 대신 저 친구들이 ‘운동’한다고 생각했고 ‘운동’하는 사람들은
사우디로 나간 일꾼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다 같이 애국했다.
따라서 다 같이 긍지를 가질 만하지 않겠는가?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안길수가 입을 열었다.
“발전했죠.”
짧게 대답하고 나서 안길수가 침을 한번 삼키더니 덧붙였다.
“비약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놈은 우리가 썩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오.”
조철봉이 작심하고 말했다.
종로에서 귀싸대기 맞고 한강에 가서 화풀이한다고 해도 좋다.
누가 알겠는가?
그 어떤 놈이 북한 부대사 이용태라는 것을,
어리둥절한 표정의 안길수를 향해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한국 경제의 나쁜 면만 부각시키는 놈들이 있다니까. 아주 싹수가 없는 놈들이지요.”
“그렇습니까?”
“한심한 깜냥에 자존심만 내세우고 말야, 주제 넘게 누굴 가르치려고 지랄한다니까.”
그러고는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이만 하면 이용태한테 당한 스트레스는 해소했다.
안길수가 영문을 모르건 말건 상관없다.
어차피 같은 패거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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