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9
그새 밥상을 부엌에 갖다 놓고 나온 소천이,
“날이 아직 찹니다. 바쁘지 않거든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하고 권하니 춘추가 주인도 없는 안방에 들어가기가 마뜩찮다며 대청에 그대로 앉아
소천과 몇 마디 한담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날이 많이 풀렸네.”
“입춘 절기가 아닙니까.”
“자네를 보니 흠순이도 많이 컸겠네. 흠순이는 요번에 같이 안 왔는가?”
“작은도련님은 형님처럼 국선이 되겠다며 화랑들을 열심히 쫓아다녀
집에 식구들도 얼굴을 잊어버리고 산 지가 이미 오랩니다.”
“허, 어떻게들 장성하였는지 궁금하구먼. 보희 낭자는 아마 나랑 동갑일 게야.”
“흠순 도령과 저보다 두 살을 더 먹었으니 해가 바뀌면 스물 다섯이지요.”
“그 밑에 막내 누이는 이름이 뭐였더라?”
“문희 낭자지요.”
“맞아. 문희였지. 내가 부친을 따라 한창 만노군에를 다닐 때는
그 문희가 아랫도리를 죄 벗고 마당을 기면서 흙장난을 했었는데.
가만 있자, 그도 이젠 처녀 소리를 듣겠는걸?”
“원 도련님도, 나이가 방년 스물하고도 하납니다요!”
“글쎄 그렇게들 됐겠어, 허허.”
춘추는 어려서 본 유신의 두 누이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은근히 궁금했지만
이제는 장성하여 남녀의 예가 있으니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소천이 용케 그런 춘추의 마음을 헤아리고서,
“인물로 치자면 큰낭자보다 아우가 요만큼 낫습지요.”
하고 손가락 마디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춘추가,
“나이들이 꽤나 찼는데 아직 혼처는 정하지 않았는가?”
하니 소천이 고개를 절절 흔들며,
“큰도련님께서 서른을 넘기고도 아직 혼자이시라
우리 금관국 법도로는 아우들을 먼저 성취시키는 게 흔쾌한 일이 아닌가 봅디다.”
했다. 춘추는 소천이 가야국을 거론하자 내심 크게 놀랐다.
“가야국 법도라니, 아직도 세간에 정말 그런 게 남아 있는가?”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신라 왕족인 춘추로선 속사정을 엿볼 만큼 가까운 가야 출신도 없었고,
한발 더 나아가 백성들의 살림이나 저자의 민심을 정확히 파악할 기회도 없었다.
그런 춘추에게 소천이 가르치듯 대답했다.
“나라가 망했지 수백 년 내려오던 풍습과 예절이야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금 세상엔 설움받는 가야 후손들 사이에서 오히려 망국의 전통과 습속을 지키고
따르려는 의지가 날로 더 맹렬하지요 .
지난 정월 초사흗날과 이렛날은 수릉왕묘(首陵王廟:수로왕의 능)에 제사지내는
금관국의 명절이었는데, 친히 묘제를 주관하시고 돌아온 하주 나리께서 해마다
참배객이 늘어난다며 기뻐하셨습니다.”
소천의 말을 들으며 춘추는 눌최의 장지에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높여 싸우던 광경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깊이 차탄하고 앉았다가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다시 물었다.
“일전에 듣자니 남녀간의 혼사 문제에도 간혹 가야 사람임을 들어 배척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
혹시 용화 도령이나 그 누이들이 짝을 구하지 못한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닌가?”
“큰도련님이 혼사를 미루고 있는 것은 도련님 자신의 뜻인 줄 압니다.
하지만 그 진적한 까닭이야 누가 알겠습니까?”
소천이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데 갑자기 담 너머 골목길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여자들이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천이 반색을 하며,
“이제들 돌아오시는가 봅니다.”
하고는 잰걸음으로 달려가 대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춘추가 대청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취한 채 열린 대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유신은 나타나지 아니하고 누이들만 들어섰다.
“큰도련님은 안 오십니까?”
춘추가 묻고 싶은 소리를 소천이 대신 묻자 두 누이 가운데 더 어려 뵈는 낭자가,
“큰오라버닌 한길까지 같이 왔다가 요 앞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문무제에 가셨어.
명활성 축국장에 멧돼지가 뛰어들었대나?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걸 붙잡았는데
누가 눌최의 혼령이 깃들었을지도 모르니 살려주자고 해 시비가 붙은 모양이야.”
하고서,
“잡아먹자는 측은 보나마나 신라인들이고, 방생하자는 측은 틀림없이 가야 청년들일 거야.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장지나 상가에선 살생을 금하는 게 가야국 민속이라고 하셨거든.”
하였다. 문희가 거침없이 재잘거리는 품이 집에 손님이 든 것을 까맣게 모르는 눈치였다.
소천이 빙긋이 웃으며,
“춘추 도령께서 벌써부터 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고 댓돌에 엉거주춤 선 춘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두 낭자가 동시에,
“어머나!”
기겁을 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곤 이내 앞서거니뒤서거니 뒤채로 달아나는데,
잠자코 있던 보희는 고개를 외로 꼰 채 걸음이 바빴으나 재잘거리던 문희는
오히려 뒤따라가면서 내외하는 시늉만 하였고,
춘추의 앞을 지나칠 때는 눈길도 맞추고 제법 웃음까지 짓는 여유를 부렸다.
춘추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문희의 명랑한 말투며 풋풋하고
싱그러운 미색에 한동안 착실히 넋이 팔렸다가,
“어쩝니까, 큰도련님이 명활성 축국장으로 갔다고 합니다.”
하는 소천의 얘기를 듣고서야 번뜩 정신이 들어,
“어, 하는 수 없지. 그렇다면 나도 축국장에를 가야 할밖에.”
말을 마치자 정신없이 대문으로 달려가는 품이 흡사 보지 못할 것을 본 사람 꼴이라
소천이 배웅하려고 따라나갔다가,
“저 양반이 갑자기 왜 저러나?”
하며 혼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21 (0) | 2014.09.17 |
---|---|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20 (0) | 2014.09.17 |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8 (0) | 2014.09.17 |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7 (0) | 2014.09.17 |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6 (0) | 2014.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