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20

오늘의 쉼터 2014. 9. 17. 16:46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20

 

 

 

춘추가 명활성 밖 공터에 도착했을 때는 문희한테서 들은 멧돼지 소동이 이미 종결된 뒤였다.

 

유신이 그날은 마침 모든 것을 조심하고 금기하는 오기일인 데다 아직도 눌최의 상중이라

 

살생은 하지 않는 것이 도리라 판정하여 멧돼지는 산으로 돌려보냈고,

 

대신 조정에서 보낸 찰밥과 술이 당도해 청년들이 장설간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춘추는 몇몇 청년들에게 둘러싸인 유신을 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형님……”

그는 유신의 등뒤에서 살그머니 옷깃을 잡아당기며 처음으로 형님이라고 불렀다.

“오, 아우님 오셨소!”

춘추를 발견한 유신이 크게 반색했다.

“그러잖아도 아까 아우님 집의 별배를 상수관 앞에서 만났는데

 

내 집에 약간 귀찮은 일이 생겨 먼저 그 일을 좀 보았소.”

“형님께 용무가 좀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오?”

춘추는 주변에 둘러선 청년들을 가리키며 은밀히 눈짓을 보냈다.

 

유신이 춘추의 뜻을 알아차리고 청년들 틈에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한적한 풀밭으로 자리를 옮겨가자

 

춘추는 비로소 말문을 열고 지난번에 나누었던 얘기들을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춘추의 얘기를 듣고 난 유신은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가타부타 대꾸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는 동안 유신이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으니

 

춘추는 혹시 유신의 마음이 상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 일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형편을 설명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이윽고 유신이 눈을 뜨더니,

“혹시 아우님은 축국을 해본 적이 있소?”

하고 물었다. 유신의 돌연한 질문에 춘추는 잠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갑시다, 가서 나하고 어울려 발길질이나 한번 합시다.”

유신은 밝은 낯으로 춘추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화랑들의 우상인 김유신과 임금의 외손인 춘추가 별안간 공을 차겠다고 나서니

 

축국장에 모인 젊은이들은 어리둥절한 중에도 뜨거운 함성과 환호를 올리며 서둘러 공터로 모여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편을 갈라 각자 따르는 청년들을 이끌고 공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직 코끝에 닿는 바람이 차갑고 해가 있어도 쌀쌀한 날씨였지만 구르는 공을 따라 생마처럼

 

공터를 쫓아다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신은 복두와 방포를 벗어 던졌고, 춘추 또한 연신 숨을 헐떡거리며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허리띠를 벗었다.

 

진골 복장을 팽개치고 기탄없이 웃통을 드러낸 화랑이 여럿이요,

 

낭도들 중에는 바지까지 벗은 자도 없지 않았다.

 

오로지 공을 따라 한덩어리가 되어 뒹구는 마당에 위신이며 체통 따위를 걱정하는 이가 어디 있으랴.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한참을 놀고 난 뒤였다.

 

축국장의 청년들이 모두 기진맥진해졌을 무렵,

 

유신은 춘추와 공을 두고 다투다가 그만 춘추의 옷 끈을 발로 밟아 떨어뜨렸다.

“이거 큰일났지 않소. 내 실수로 아우님이 그만 망신을 당하게 생겼구려.”

유신은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축국장에서야 그래도 저래도 그뿐이지만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저고리 끈이 떨어져 앞섶을 여밀 수 없으니 속옷과 맨살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했고,

 

그런 차림새로 남들의 이목이 번다한 민가를 지나쳐 집에까지 갈 일을 생각하자

 

춘추도 눈앞이 캄캄했다.

“다행히 우리 집이 예서 가깝고 마침 하주에서 내 누이들이 와 있으니 가서 옷 끈부터 답시다.”

유신의 제안에 춘추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유신의 큰누이 보희는 금성에 와서 자던 첫날밤 희한한 꿈 하나를 꾸었다.

 

서형산(西兄山) 꼭대기 후미진 곳에서 몰래 오줌을 누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오줌줄기가 그치지 않더니 삽시간에 왕경 전체가 물바다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사람도 짐승도 대궐도 민가도 전부 자신이 눈 오줌에 잠겨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불어난 물에 둥둥 떠내려가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보희는 너무 놀라고 부끄러워 허둥대다가 눈을 떴다.

참 이상하고 망측스런 꿈도 다 있구나 싶어 홀로 얼굴을 붉히던 보희가 뒷날 아우 문희를 보고서,

“얘, 내가 간밤에 금성을 온통 오줌바다로 만들었단다.”

하며 꿈 얘기를 소상히 털어놓으니 다 듣고 난 문희가,

“그럼 임금님도 조정 대신들도 모두 언니 오줌에 빠져 허우적거렸겠네?”


하고 깔깔댔다.

“보지 않아 모르긴 해도 임금님이라고 별수 있었겠니.”

“길몽이우. 언니가 남자였다면 천하가 깜짝 놀랄 큰일을 낼 꿈이야.”

“오줌이 안 그쳐 답답하기만 했는데 길몽은 무슨 길몽. 용케 중간에서 깨어났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갔으면 정말 이부자리에 큰 실수를 했을지도 몰라, 얘.”

“어쨌거나 용변을 보는 꿈은 재수꿈이고 길몽이래.

 

저번에 소천 어멈은 똥꿈을 꾸고 길에서 은가락지를 주웠다지 않았수?

 

 언니도 금성에 오자마자 재수꿈을 꾸었으니 또 누가 알아,

 

길에서 근사하게 생긴 멋진 도령이나 만날는지.”

“얘, 오줌장군같이 생긴 자나 안 보면 다행이겠다.”

두 자매가 한동안 착실히 농지거리를 하던 끝에 문희가 돌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언니야, 그 꿈 나한테 팔아라.”

하니 보희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오줌꿈을 사서 뭐하게?”

하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