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7

오늘의 쉼터 2014. 9. 17. 16:29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7

 

 

 

만명이 유신을 밸 때는 늠름하게 생긴 동자가 금빛 갑옷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와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지만 보희를 낳을 때는 백발의 늙은이가 찾아와 밥을 달라 청하였다.

 

만명이 하인을 시켜 밥상을 차려내니 늙은이가 휘휘 손사래를 치며,

“내가 언제 별배더러 달라고 하였나, 부인이 손수 밥을 차려주오.”

하여 만명이 속으로 망령 난 늙은이라 흉을 보면서도 다시 상을 차려 나갔다.

 

늙은이가 순식간에 밥과 찬을 씻은 듯이 비우고 나더니,

“밥 얻어먹은 값을 물어야지.”

하고서 지니고 있던 바랑 속을 뒤적거려 진흙이 잔뜩 묻은 밥주발 같은 것을 꺼내놓았다.

“이게 무어랍니까?”

만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그 늙은이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신을 찾아 신으며,

“그게 꼴은 그래도 왕관이오. 잘 닦아서 쓰오.

 

 비록 망한 나라의 관이긴 해도 왕관은 왕관이지.”

하고는 그대로 일어나 나가려고 하였다.

 

순간 만명의 생각에 진흙이 잔뜩 묻은 더러운 것이 무슨 왕관일 리 있겠나 싶고,

 

일변으론 설사 왕관이더라도 망한 나라의 왕관이라니 귀하다기보다는 께름칙한 느낌이 앞섰다.

만명이 그렇게 느낀 데는 평소 남편인 서현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그는 서현이 금관국의 왕손이라는 사실을 제발 잊어주기 바랐다.

 

그따위 부질없는 향수와 자부심을 뇌리에서 말끔히 지우고 오직 신라 사람으로,

 

어떻게든 신라에서 벼슬을 높이고 자식들의 앞길을 닦아주었으면 싶은 것이 만명의 속내였다.

 

그럼에도 서현은 일생을 망국민들에 둘러싸여 세월과 가산을 허비했을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입에 발린 칭송과 제왕 같은 대접을 받으며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집에서 밥 한 그릇을 먹어도 가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찬을 주문했고,

 

가야의 대사일(大祀日)과 명절에는 금관의 고성(古城)을 찾아가 끊어진 제사를 받들었으며,

 

집안에도 어느 망국민이 그렸다는 수로대왕과 구해왕의 진영(眞影)을 벽에다 걸어두고

 

조석으로 절을 해대며 신주처럼 모셨다.

 

특히 단오절 같은 가야인의 큰 명절날에는 술과 떡을 빚어 찾아오는 망국민들을 일일이 대접했고,

 

밥상을 물리고 나면 입가심으로 마시는 단술을 내어오라고 성화였다.

 

또한 식후에는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차나무 잎으로 끓인 차에 찐 대추를 띄워 마셨는데,

 

망국민들은 서현이 차를 좋아하는 줄 알고 전날 금관국 도성이 있던 금관주(김해)

 

차전밭(茶田)과 찻골(茶谷)에서 따온 차나무 잎을 한 움큼씩 가져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만명도 그런 서현의 마음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정도가 과하다 싶고, 또 아는 사람을 통해 관가의 소문을 들어보니

 

서현이 망국민들과 어울려 큰일을 낼 거라는 우려 의 소리까지 나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갈수록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서현은 어린 유신을 훈육할 적에도 말끝마다,

“너는 5백 년 가락 왕실의 적손이다.

 

금관국의 시조 할아버지이신 수로대왕께서는 알에서 태어나셨는데,

 

처음 그 알은 하늘에서 새끼줄을 타고 내려온 금합(金盒) 속에 들어 있었다.

 

그때 금합 속에는 황금알이 6개가 들어 있었고, 그 알들이 모두 사람으로 변해

 

여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는데, 너희 수로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알을 깨고 나오셨단다.

 

그래 휘가 수로(首露)인 게야. 그러니 가야국 망국민들은 모다 한형제나 다를 바 없다.”

네댓 살짜리 어린애를 데리고 앉아서 가야국의 내력을 골백번도 더 입에 담았다.

 

가끔씩은 수로왕이 신라의 석탈해를 도술과 힘으로 굴복시킨 얘기와 그 뒤 신라왕의 초청을 받고

 

계림에 왔다가 대접이 시원찮다는 이유로 족장 하나를 칼로 베고 돌아간 일1) 따위를

 

마치 눈으로 직접 본 듯 시시콜콜 늘어놓기도 했다.

“금관은 본래 계림의 상국이었단다.

 

일찍부터 창성한 금관국의 문물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의 계림이 있었겠느냐.

 

본래 계림의 풍속은 천박한 것이요,

 

금관의 습속은 고아하기 그지없었다.

 

너는 바로 그런 금관대국 왕실의 적손이다.

 

어떤 경우에도 품위와 자부심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한다.”

물론 아들이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서현의 뜻이야 모를 턱이 없었지만

 

만명은 현실을 망각한 이런 식의 지나친 가르침이 급기야는 자식까지도

 

서현과 같은 인생을 살게 하지나 않을까 몹시 걱정이 되었다.

 

어차피 망한 가야국이 다시 설 리 없을진댄 순수한 신라 사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라 왕실의 외손으로 성장해주었으면 하는 게 만명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이런 불만이 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만명은 늙은이가 내민 흙 묻은 왕관을 끝내 받지 않았다.

 

늙은이는 잠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싫다면 하는 수 없지. 그럼 뭘 주나?”

하더니 다시 헤적헤적 바랑을 뒤져 연청색 곡옥 하나와 비단에 싸인 황금 호랑이 형상을 내어놓았다.

“괜찮아요. 밥값은 무슨, 그냥 넣어가지고 가세요.”

“이래뵈도 공밥은 안 먹소. 길이 바쁘니 어서 하나를 집으시오.”

만명은 몇 차례나 계림의 인심을 들어 거절했지만 노인이 워낙이 막무가내여서 밥 한 끼 값으로

 

너무 과하다 싶은 황금 호랑이 대신 곡옥을 집어들었다.

 

이것이 보희를 가질 무렵에 꾼 태몽이요,

 

보희(寶姬)란 옥을 보고 얻었다고 지은 이름이었다.

그로부터 이태 뒤에 밥 얻어먹고 갔던 바로 그 늙은이가 또다시 꿈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전과 똑같이 밥을 달라고 청하여 얻어먹고 나더니

 

처음 내놓은 것이 진흙투성이의 왕관이었다.

 

하지만 만명은 그때도 역시 왕관을 사양했다.

 

그러자 늙은이는 지난번과 똑같이 바랑을 뒤져 비단에 싸인 황금 호랑이를 꺼내놓고서,

“하면 이거라도 받소.”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한 뒤 홀연 종적을 감추었는데,

 

만명이 물건을 돌려주려고 얼마만큼 쫓아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더니

 

대문 앞에 진짜 호랑이가 집채만한 체구로 버티고 섰다가,

“어흥!”

하늘이 무너질 듯 우렁찬 포효와 함께 훌쩍 땅을 박차고 만명을 덮쳤다.

 

그 무섭고 섬뜩한 태몽 끝에 얻은 사내아이의 이름이 바로

 

순색비단 순(純)자를 써서 흠순(欽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