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8
늙은이는 흠순을 낳은 이듬해 세번째로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세 번이 모두 같은 사람, 같은 행색이었다.
밥을 얻어먹고 나자 늙은이는 또 진흙이 묻은 왕관을 꺼냈다.
“남은 게 이것뿐이오. 이젠 부인이 싫건 좋건 받아줘야겠소.”
늙은이의 말투는 사뭇 근엄했다.
거역하기 힘든 위엄마저 느껴지는 말투였다.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만명은 곰곰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판에 박은 듯이 같은 꿈을 무려 세 번씩이나 꾼다는 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꿈을 꾸고 나면 반드시 몸에 태기가 도는 것도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홀로 짐작에 또 애가 들어서는 건 아닐까 싶었더니 아니나다를까,
당장 며칠 뒤부터 밥내가 거슬리고 왈칵왈칵 헛구역질이 났다.
“당신이 꿈에 받은 왕관은 아마 우리 금관국의 왕관일 게요.
금관국 열성조께서 우리 슬하에 출중한 인물을 점지해주시려고 음조하시는 것이 분명해.
햐, 과연 어떤 걸출한 놈이 나올는지 벌써부터 궁금하지 않소?
요번에 얻은 부인의 꿈이 그동안의 아이들 태몽 중에서는 제일 상치외다.”
꿈 얘기를 전해들은 서현은 손뼉을 치며 크게 좋아했다.
그는 미리부터 또 아들을 볼 거라며 부러지게 입찬말을 하고 다녔는데 만명의 예상도
서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 산달이 되어서는 아들 맞을 준비를 빈틈없이 하고서 삼신당에 지낼 제사며 축문까지
준비하였더니 정작 날짜가 되어 나온 아이는 아들이 아닌 딸이었다.
서현은 이미 두 아들을 두어 아들이건 딸이건 별반 개의치 아니한 바이지만 영판 나오리라
여겼던 아들이 딸로 바뀌니 그게 서운하고, 또 태몽을 떠올리매 왕관과 관련이 있으려면
아무래도 아들이 옳지 싶어 한동안 허탈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유신을 낳은 뒤로는 난산이 없고 달수도 크게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어쨌거나 모든 게 하늘의 뜻이요 조상의 음덕이다.”
겨우 상한 마음을 다스리고 삼신당에 제사도 모시고 술과 떡을 빚어 축문까지 바쳤는데,
제사 지낸 며칠 뒤 한 탁발승이 시주를 왔다가,
“이 집에서 나온 서기가 서릿발처럼 사방에 뻗치니 필경 귀한 자식을 보았을 것이오.
이름에 글월 문(文)자를 넣어 지으면 훗날 머리에 대관을 쓰게 되리다.”
뭘 알고 하는 소린지, 애 낳았다는 동네 소문을 듣고 시주 받자고 하는 소린지
꽤나 신통한 말을 전했다.
그 소리에 서현은 서운하던 마음을 비로소 고쳐먹고,
“그래, 훗날 왕후라도 될는지 누가 알어.”
하고는 그 탁발승으로부터 글자를 받아 문희(文姬)라고 딸 이름을 지었다.
이렇게 2년 터울로 본 유신의 아우들이 모두 별탈없이 장성하여 연애할 나이들이 되었다.
보희는 자랄수록 아버지를 닮아 키가 헌칠하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생겼고,
흠순은 인물이 하도 곱살해 어려서부터 곧잘 여자 아이 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개중엔 정말 계집애인 줄 알고,
“너는 노는 게 어찌 그토록 사내 같니? 그러고 보니 얼굴도 사내처럼 생겼구나.”
하고 말하는 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 곱살한 애가 나이 10여 세를 넘기면서부터 기운을 쓰는데,
어른 둘이서도 간신히 드는 돌절구를 혼자서 사뿐히 옮겨놓고,
성보도 낑낑대는 쌀가마를 무슨 볏짚 나르듯이 가볍게 날랐으며,
열대여섯 살 어귀엔 밭 가는 소 뒤에서 쟁기를 발로 지긋이 밟고 있으면
소가 오줌을 철철 싸가며 죽어라 제자리걸음만 해댔다.
당시 만노군의 숯골과 풀무골에는 국원 소경(國原小京) 근교에서 캐낸
철석(鐵石)을 싣고 다니는 우마차가 길에 흔했다.
어느 궂은 날, 갑자기 몰아친 폭우와 천둥에 놀라 길길이 날뛰던 말을
흠순이 맨손으로 목을 낚아채어 진정시키자 마침 낭도들을 이끌고 지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유신이,
“한 줌 복어 독에 장정 백이 죽는다고, 누구라도 저 아이 외양만 보고 시삐 여겼다간
대경을 치를 것이다.”
하며 혀를 내두른 일도 있었다.
왕관 태몽 끝에 얻은 딸 문희는 어려서는 언니보다 인물이 못했다.
양친을 골고루 닮아 오목조목 귀엽기는 해도 용모에서 풍기는 시원스런 맛이 보희보다 덜하였는데,
자라면서 차츰 눈매가 상현달처럼 변하고 이목구비가 제자리를 잡아가더니
어느 순간 여름 볕에 농익은 석류처럼 미색이 툭 터져 언니보다 오히려 미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마가 넓어 달덩이 같은 것과 오뚝 선 콧날은 영락없는 어머니 만명부인이요,
갸름한 얼굴에 도톰한 입술, 까무잡잡하면서도 윤이 나는 건강한 피부는
금관국 왕실로부터 온 것이었다.
성격도 두 자매가 판이해서 보희는 장녀답게 마음 씀씀이가 대범하고 무던한 데 반해
문희는 손끝이 맵고 욕심이 많으며 애살스러운 만큼 애교도 많았다.
만노군 사람들은 태수 집 두 딸을 일컬어 장녀는 장녀답고 막내는 막내답다고 하나마나한
소리들을 했지만 정작 서현 내외는 문희를 볼 때마다,
“저 아이는 아무래도 외탁을 했나 봅니다.”
“무엇이 외탁이란 말이오?”
“백제로 시집가 왕비가 된 선화처럼 인물로 보나 당돌한 성격으로 보나
계림 왕실 여자들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지요.”
“그런 소리 마오. 우리 막내딸 인물은 금관국에서 온 거요.
하다못해 검고 빛나는 피부까지도 우리네 내력이지.
그게 시조대왕 부인이셨던 허황후 할머님한테서 내려온 것이거든.”
“어이쿠 갖다 붙이시긴. 허황후 할머님이 대체 언젯적 어른이신데 거기까지 올라갑니까?”
각기 자신의 집안과 왕실 계보를 들먹이며 어린애들처럼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만나려던 사람이 없으니 춘추는 맥을 놓고 대청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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