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4
취산에 살던 이승 낭지가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겼다며 산을 내려간 것은
정해년(627년) 설날 아침이다.
낭지가 산을 내려가기 전에 취산 움막으로 머리를 산발한 한 거사가 찾아와
밤새 무슨 말인가를 조곤조곤 나누었는데,
신새벽에 그 거사가 신을 신고 나서며,
“월하빙인이란 그 선계의 고집불통이 이미 남녀의 발에 묶어놓은 붉은 끈(赤繩繫足)을
과연 연로하신 법사가 풀어낼지 의문이오.”
하니 낭지가 밖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사래를 치며,
“세상을 오래 살면 느는 게 꾀밖에 없네. 걱정 말어, 어어, 걱정 말게나.”
하고서 피곤하다며 자리를 깔고 누웠다.
거사는 떠나고 뒷날 중식 때쯤에 일어난 낭지가 물에 만 밥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부랴부랴 어디론가 향하였는데, 그로부터 사나흘 뒤 낭지의 움막으로
머리에 붉은 실을 잔뜩 매단 이상한 사람 하나가 성을 불같이 내며 나타나,
“낭지라는 중놈은 어딨느냐? 냉큼 이리 나오지 못할까!”
하고 다짜고짜 호통을 쳐댔다.
낭지의 시자들이 보니 눈알이 푸르고 양 귀가 어깨까지 늘어진 것이
비록 사람의 형상은 하고 있었지만 귀신을 만난 듯이 두렵기만 했다.
그래 한동안은 눈치만 살피며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는데,
위인이 하도 포악을 떨며 버릇없이 욕질을 해대니 보다 못한 늙은 시자 담수가 나와,
“그대는 대체 뉘시오? 뉘신데 산문의 큰스님을 함부로 강아지처럼 불러대시오?”
하고 점잖은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 귀신같기도 하고 광대 같기도 한 자가 담수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고 나서는,
“나는 수미산 얼음골에 사는 신인(神人)으로 이름은 적승자(赤繩子),
다른 말로 월하빙인이라고도 한다.
태고이래 삼라만상이 모두 내가 매어놓은 붉은 끈에서 나왔으니
이를테면 육계(六界)를 짓고 이끌어가는 주인이 바로 나다.
그렇지만 내가 세상을 멋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행의 순리와 육도(六道)의 법칙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천하대사를 관장해왔거니와 그 도저하고도 오묘한 이치를
너희가 무슨 수로 알겠는가.”
제 자랑을 침이 마르도록 하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런데 낭지라는 그 천하의 몹쓸 중놈이 쥐새끼처럼 수미산에 기어들어 멋대로 장난질을 쳐놓았으니
내가 억겁을 살던 중에 이런 일은 처음이요, 낭지와 같은 중은 태고 이래 둘이 없었다.
이러고 도 제 놈이 어찌 천벌을 면하랴.
제아무리 불도를 닦아 윤회의 사슬을 빠져나가더라도 육계에 머물고 있을 때만은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지!”
말을 마치자 다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이놈 낭지야, 어디 숨었느냐?
네가 헝클어놓은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어지게 생겼다!
당장 나오지 못하겠느냐, 이놈아!”
적승자는 그 뒤로도 한식경이나 더 포악을 떨고 거벽을 치다가 돌아갔는데,
가기 전에는 약간 눅은 목소리로 담수를 보고 부탁하듯 말하기를,
“노승이 낭지 법사를 만나거든 잘 설득을 해보소.
법사가 아무래도 남녀간의 인연을 건드린 모양인데 도대체 누구의 연분 끈을 건드렸는지 알 수가 없소.
그걸 바로잡아놓지 않으면 후세엔 끈이 얽히고설켜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오.
더구나 그렇게 법이 틀어지면 삼신산에서 애 만드는 일도 덩달아 꼬이게 마련이오.
애 만드는 그놈의 삼신산 할미는 어찌나 성격이 별쭝맞은지 한번 화를 내면 아무도 상대할 사람이 없어.
내가 그 할미 얼굴만 떠올려도 등에서 진땀이 다 나오.
하니 낭지 법사가 오거든 이런 딱한 사정을 잘 말해주시오.
모든 건 없던 걸루 할 테니 누구의 연분 끈을 건드렸는지,
제발 그것만이라도 가르쳐달라고.”
하고서,
“대엿새 뒤쯤 다시 오리다.”
하여 담수가 일변 황당해하면서도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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