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5

오늘의 쉼터 2014. 9. 17. 16:11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5

 

 

 

금성에서 문무제가 열리는 동안에 해가 바뀌었다.

그즈음 춘추는 유신을 만나 왕도와 패도를 거론하며 임금의 자질에 대해 떠벌린 일을 마음속으로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듣기에 따라선 자신이 마치 보위에 야심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금왕 만세후 자신의 신변을 늘 걱정하던 터요,

 

장안에서도 이세민 형제의 처참한 골육상잔을 목격하면서 보위에 대한 욕심이

 

사람을 얼마나 추악하고 끔찍하게 몰아가는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그였다.

 

혹시라도 유신과 나누었던 말이 퍼져 백반이나 그 자식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자신은 미처 뜻을 펴보기도 전에 죽임을 당할 것이며, 설사 목숨을 부지한다 해도

 

아버지 용춘이 걸어간 길을 고스란히 답습할 게 뻔했다.

 

그것은 차라리 죽음보다도 못한 길이었다.

춘추가 께름칙한 느낌으로 궐에 설날 인사를 다녀오는데 집 근처에서 승복을 입은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기골이 강건하나 살이 없고 승복은 입었지만 머리를 길렀는데,

 

가슴까지 내려오는 길고 흰 수염에 얼굴은 해맑은 동안이라 도대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춘추가 그 이상하게 생긴 노인의 앞을 몸을 낮추어 막 지나쳤을 때였다.

“허허, 귀인이 될 존귀한 상이로고.”

등뒤에서 들려오는 느닷없는 소리에 춘추는 발걸음을 되돌렸다.

“방금 무엇이라 하셨는지요?”

“그러나 때가 아직 이르고 또한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겠소.

 

물길 구만리 산길 구만리를 지나야 존귀하게 될 것이니 어찌 그 인생이 고달프지 않으리.

 

자칫 잘못하면 도중에 횡액도 만날 수 있고.”

“스님께서는 뉘시온지요?”

춘추가 노인에게 다가서서 공손히 허리를 굽혀 묻자 노인은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했다.

“일찍부터 곧은 나무는 거목으로 자라기 어렵고 민가에 내려온 어린 범은 백수의 왕이 되지 못하는

 

법이지.

 

만군의 적을 치기는 쉬워도 한뼘 내 마음을 단속하기는 힘드니 어디를 가든 조심하고 또 조심하시오.”

말을 마치자 노인은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쏜살같은 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기이한 노인을 만나고 나서 춘추는 더욱 고민에 빠졌다.

 

미치광이 노인의 공연한 헛소리쯤으로 여겨버릴 수도 있었지만 춘추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 앞에서 만난 노인이 무슨 신선처럼 느껴지면서 횡액 운운하던 몇 마디 당부도

 

너무 일찍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말라는 하늘의 경고처럼 들렸다.

 

그러고 생각하니 노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신통하기 그지없었고,

 

그럴수록 유신과 나눈 말이 새어 나갈까봐 불안했다.

한편으로는 나라 꼴이 엉망인데도 일신의 안위 따위나 걱정하는 자신이 몹시 한심하기도 했다.

 

거세고 맹렬하게 일어나는 성세(聲勢)의 시발을 본 탓일까.

 

중국에서 돌아온 뒤로 춘추의 눈에는 모국 신라 왕실의 쇠잔한 모습이 자꾸 눈에 보이고,

 

대책조차 없는 무기력함이 곳곳에서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임금은 이제 늙고 기력이 없어 신하들을 데리고 정사를 보면서도 졸기 일쑤요,

 

밥을 씹으면 절반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으며, 오줌을 지려 곤룡포를 흥건히 적시는 일도 다반사였다.

 

간혹 총기가 돌아와 제대로 정무를 살필 때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그러다가도 이내 기운이 떨어지면

 

갑자기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주변을 걱정스레 만들곤 했다.

자신이 중국으로 떠날 때도 나라 형편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리산과 거타주의 절반을 잃고도 속수무책인 지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딱하고 답답한 것은 지금의 이 쇠잔한 왕업을 일으켜세울 장래의 적임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금왕 이후 나라를 맡을 인물이 없었다.

 

백반 역시 칠순이 넘은 노인이라 금왕보다 오래 산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설혹 그가 보위를 잇는다 해도 쇠약해진 계림의 왕업을 일으키기엔 역부족인 사람이었다.

 

지략이나 혜안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그는 금왕의 덕목인 관후함마저 갖추지 못한

 

위인이었다.

 

평생을 보위에 대한 욕심 하나로 살아왔으나 임금이 되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임금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 백반이 계림의 왕업을 맡는다면 나라 꼴은 더욱 어려워질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자질 하나만을 놓고 보면 국반의 인품이 백반보다는 한결 윗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정사에는 별뜻이 없는 사람이요,

 

백반이 있는데 보위가 국반에게까지 흘러갈 턱도 없었다.

후대로 내려오면 사정은 더욱 답답했다.

 

금왕에게는 적자가 없고 국반도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성골 출신의 남자로는

 

오로지 백반의 아들인 태(泰)와 비담(毗曇)이 있을 뿐인데,

 

그 둘은 임금의 재목은커녕 한 집안의 가장으로 처자식도 거두지 못할 만큼 됨됨이가 참담했다.

 

태는 제 아버지의 권세만을 믿고 허구한 날 색주가를 전전하며 기생 치마폭에 싸여 일생을 사는

 

위인이요,

 

비담은 비록 제 형보다는 낫다지만 간악한 술수에 능하고 성정 또한 포악하기 이를 데 없어 아는

 

사람들은 죄 고개를 쩔쩔 흔들었다.

 

만약 그들 두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보위가 간다면 계림의 사직이 망하는 것은 가을 겨울에

 

수목이 황락하는 것처럼 명확한 일이었다.

 

춘추로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연로한 임금이 장대한 체구를 가누지 못해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행차하는 광경을

 

대할 때마다 춘추는 외손으로서 느끼는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고개를 쳐들곤 했다.

 

시초엔 그런 생각만으로도 대단한 불경을 저지른 듯하여 얼굴이 화닥거릴 정도로 깜짝깜짝 놀랐다.

 

한편으론 부형을 힘으로 제압하고 보위에 오른 이세민의 영향이 아닌가 싶어 내심 자신을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불경한 마음을 품지 않으려고 해도 임금의 노쇠한 모습을 조석으로 대하면서

 

뜻이 자꾸만 그쪽으로 치닫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눌최와 벌구의 시신을 찾으러 백제를 다녀온 뒤론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소문으로만 들어온 백제왕 부여장은 과연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고,

 

대궐의 군신들 사이에도 신라와는 다른 위엄과 절도가 있었으며,

 

목기루를 따라 남향하며 눈여겨 살핀 성곽이나 도처 에서 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은

 

백제의 강성함을 설명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한겨울임에도 백성들은 떡을 쪄서 이웃과 갈라먹을 만치 살림이 넉넉했고,

 

지나치는 길에 엿본 민가와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도 하나같이 언행이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맥이 빠지고 풀이 죽은 신라의 국세와는 너무도 판이한 모습이었다.

춘추가 정체불명의 노인에게서 들은 말로 한창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백반이

 

용춘과 춘추 부자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명분은 신년 인사와 춘추의 무사귀환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겠다는 것이었지만 춘추로선

 

그 자리가 마음에 흔쾌할 리 없었다.

술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백반은 자신의 두 아들인 태와 비담을 불렀다.

 

두 사람 다 춘추보다는 나이가 10여 세 위였다.

 

거나하게 취한 백반은 용춘이 보는 앞에서 춘추와 두 아들의 손을 한꺼번에 붙잡고

 

전에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림의 앞날은 이제 너희들 손에 달렸다.

 

근년에 부쩍 시운이 불우하여 정사가 약간 어지러워졌다고는 해도 형은 아우들을 극진히 보살피고

 

아우들은 또 신명을 바쳐 형을 보필한다면 뉘라서 감히 우리 계림을 얕보겠느냐?

 

나는 너희를 믿는다.

 

나와 용춘공이 일평생 형님을 보좌하여 신명을 바쳤듯이 너희도 선대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사직을 기필코 반석 위에 올려놓도록 하라.”

백반은 몇 번이나 간곡한 어조로 형우제공(兄友弟恭)의 도리를 강조하였다.

 

춘추가 느끼기에 그는 자신의 장자인 태에게 보위가 이어질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