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3
김춘추도 그 대목에 이르러선 달리 할말이 없었다.
실정의 원인이 대부분 왕실에 있으니 성군(聖君)이 나오고 치도(治道)가 바로 서지 않는 다음에야
아무것도 기대할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춘추인들 모를 턱이 없었다.
“저는 어려서부터 왕가에 굴러다니는 중국의 사서를 잡다하게 읽은 까닭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귀감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사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윤은 걸왕의 요리사였으나 탕임금이 그를 발탁하여 국사를 맡기자 천하가 태평스럽게 다스려졌고,
사마희는 송나라에서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지만 중산의 재상이 되었으며,
범저는 위나라에서 가슴이 찢기고 이빨이 빠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뒤에 진나라로 가서
응후의 작위를 얻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임금의 왕업을 보필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인물들입니다.
요리사, 낚시꾼, 도살꾼, 심지어 원수나 포로임에도 나라에서 이를 개의치 아니하고
거용한 것은 사직을 지탱하고 공명을 세우는 데 반드시 그들의 재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목수가 있어야 궁실을 지을 때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 재목을 맞추고,
그 공역에 비교하여 쓸 사람의 수를 정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춘추의 낭랑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우리 계림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이미 존비귀천이 정해지고 골품이 발목을 붙잡아
영걸과 기재들이 일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간신이 충신의 지위를 넘고,
육정(六正)이 육사(六邪)의 명을 받드는 예가 허다합니다.
하물며 임금조차도 성골 가운데서만 나와야 하니
지금 성골이래야 나라를 통틀어 고작 열 명 안팎인데,
그 가운데 반드시 명군성주의 재목이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그릇이란 그가 다스리는 규모와 일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백 명을 휘하에 거느리는 장수와 만군을 호령하는 장수는 사람을 포용하는 그릇이 다른 법입니다.
일국의 임금이 되려면 제 나라 백성들의 뜻을 모두 담을 만큼 그릇이 커야 합니다.
그런데 삼한을 아울러 천년대업을 이루자면 그에 걸맞은 큰 그릇의 왕재가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요.
삼한이 솥발 같은 형세로 아직도 싸우고 있는 것은 지난 천년 동안 삼한 역사에
그럴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고구려왕 담덕(광개토대왕)과 거련(장수왕)이 이름을 떨쳤지만
그들은 용맹과 패도(覇道)만 알았지 관후한 왕도(王道)를 펴지 못했고,
우리 신라의 법흥, 진흥 양 대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제에서도 모대(牟大:동성대왕)나 사마(斯麻:무령대왕)처럼 뛰어난 군주가 나오긴 했어도
삼한 전체를 아우를 만한 그릇은 되지 못했습니다.
임금이란 무릇 패도와 왕도를 두루 펼 수 있어야 합니다.
패도만 알고 왕도를 모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곧 수나라 양광과 같은 자였습니다.
장병을 징발하고 군대를 강화하는 패도와, 덕치를 근본으로 삼고 인의로써 만물을 다스리는 왕도는
수레의 양쪽 바퀴와 같아서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삼한에서도 천하를 통일하려면 패도와 왕도를 제대로 아는 크고 훌륭한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천하의 민심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릇만 마련하면 민심은 낙숫물처럼 저절로 모이게 마련입니다.
옛말에도 민심은 곧 천심이라 했으니 삼한의 민심만 하나로 아우르면 마침내는
대업을 수행할 천명(天命)도 함께 얻게 되지 않겠습니까?”
유신은 춘추가 토해내는 열변을 잠자코 경청했다.
“저는 눌최의 시신을 찾으러 백제 땅에 갔을 때 부여장을 만나 몇 마디 얘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제가 본 부여장은 과연 그릇이 크고 영웅과 호걸의 풍모를 두루 갖춘 군주였지만
그 역시 패도만 알지 왕도는 모르는 인물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접경을 피로 물들이며 양국 백성들의 원한을 사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 신라의 사정은 정반댑니다.
금왕께서는 성품이 관후하여 덕치로써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받드는 신하가 없습니다.
또한 패도를 등한히 하는 바람에 나라의 존망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그러할진대 앞날을 생각하면 더욱 참담하지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작금의 왕실 사람 가운데 기대를 걸어볼 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삼한 백성들을 감동시켜 천하의 민심을 아우를 인물은 고사하고 부여장에 대항할 만한 사람조차
신라에는 없습니다.
거기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골품과 제도가 또 사사건건 발목을 붙잡는 형국입니다.
저는 아까 가야인과 신라인이 서로 패를 갈라 싸우는 광경을 보고 말할 수 없이
큰 충격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이래 가지고 천하 통일은커녕 기왕의 나라마저 둘로 나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유신은 어느 순간부터 춘추를 새삼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삼한을 아우르자면 먼저 가야와 신라로 나뉜 계림의 민심부터 한곳으로 모아야 한다는 데까지는
양자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 이후에는 장수를 키우고 군장과 군비를 축적해 군사 강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유신의 오랜 지론이었다.
따라서 덕치를 강조하는 춘추의 주장은 유신과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지만
유신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춘추에게 대단한 호감을 느꼈다.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던 5척 단구의 춘추가 문득 자신을 덮쳐 누를 듯이 거대한 인물로 보이기 시작하고,
그 못생기고 볼품없는 용모 또한 뜯어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기인의 상으로 비쳤다.
그 몇 마디 대화로 유신은 춘추에게서 한 줄기 섬광 같은 빛을 보았다.
10년 가까이 볼모로 붙잡혀 무망하고 덧없는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비록 진골이 되었을지언정 왕실 혈족 가운데 춘추와 같은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이
여간 반갑고 든든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국선이 되어 숱한 화랑과 낭도들을 가르치면서 사람을 빠르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볼 줄 아는 유신이었다.
그 길지 않은 만남을 통해 유신은 춘추라는 인물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어볼 만큼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다.
한창 신이 나서 떠들던 춘추가 문득 스스로의 말이 너무 과하다고 느꼈던지,
“하긴 진골인 제가 왕업을 말하고 명군성주의 자질을 거론하니
마치 노(魯)나라의 천한 여자가 어두운 방에서 홀로 머리를 싸매고 국사를 근심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상하게 쓸데없는 소리들을 너무 많이 지껄였습니다.
아마도 평소 존경하고 흠모하던 족숙을 뵙고 지나치게 마음이 들뜬 모양인가 봅니다.
장차 마음속에 품고 계시는 큰 뜻을 펴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드린 말씀이니
춘추의 주제넘음을 너무 흉보지 마십시오.”
하며 안색을 붉혔다. 유신이 고개를 크게 저으며,
“아니오. 도령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시종 우레처럼 크게 들렸소.
나는 계림에 인물이 없음을 늘 한탄하여왔는데
오늘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구하던 바를 얻은 듯하오.”
하고서 갑자기 표정을 밝게 하여,
“그런데 족숙이란 호칭이 당치 않소.
다음부터는 이름을 부르시거나, 내가 나이를 몇 살 더 먹었으니
옛날 양가 어른들이 당부한 대로 그저 형이라 불러주시면 영광이겠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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