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1

오늘의 쉼터 2014. 9. 16. 15:44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1

 

 

 

“그만들 두시게.”

네 사람 앞에 당도한 김유신이 짤막하게 말했다.

 

유신을 보는 순간 어린 진주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저 천존과 천품이란 형제가 사람들이 가관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신라에 불만이 있어 민심을 이간질시키고 나라를 망해먹으려고

 

모질게 작정한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너는 아직 어린 녀석이 어디를 볼강스레 나서느냐?

 

당장 칼을 거두고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유신이 고함을 질러 나무라자 씩씩거리던 진주가 홀연 무참하여 안색이 홍변했다.

 

그는 내심 칭찬을 받을 줄 알았던지,

“자초지종도 모르시면서 어찌하여 저만 꾸짖습니까?”

하니 유신이 잠자코 목자를 험상궂게 부라리므로 종내는 입을 다물고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았다.

“죄송합니다.”

진주가 혼이 나는 것을 본 죽지가 맥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유신이 그런 죽지에게,

“휘하의 낭도들을 단속하는 것이 화랑의 책무가 아니더냐?”

하고서,

“죽지는 먼저 사죄하라.”

하였더니 죽지가 군소리 없이 천존과 천품 형제를 향하여,

“낭도를 올바로 가르치지 못해 큰 결례를 저질렀소.

 

두 노형께서는 모쪼록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오.”

하고 죄를 비는데 그 언행이 어찌나 깍듯하고 공손한지 마치 딴사람을 보는 듯하였다.

 

죽지가 용서를 빌자 천존도 칼을 거두며,

“피차 공연한 짓을 하긴 마찬가지외다.

 

나도 오늘 느낀 바가 없지 않으니 오히려 고맙소.”

하였고, 천품도 웃으며,

“과연 계림의 화랑들은 만만히 볼 게 아니오.

 

박수소리에 떠밀려 하마터면 개죽음을 당할 뻔했는데 싸움이 그쳐 여간 다행스럽지 않구려.”

하고 죽지와 진주의 무예를 은근히 칭찬하였다.

 

유신은 말에서 내려 천존과 천품 형제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뵙소.”

“용화랑께선 그동안 무양하셨습니까?”

“본의 아니게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우리는 눌최가 용화향도가 아니었으면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유신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천존과 천품도 깍듯이 반절로 답했다.

“눌최의 장례에 와주어 정말 고맙소.

 

이몸을 봐서라도 오늘의 결례를 용서하오. 맺힌 것이 있으면 차차 순리대로 풀 때가 오지 않겠소.

 

먼저 용서하고 뒤에 따지는 것이 현자의 도리라 했으니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 우선 뜻을 모으고 힘을 합치는 거외다.”

“저 또한 원치 않는 싸움을 하면서 배운 바가 큽니다.

 

가야인과 신라인의 대립도 본바탕은 결국 이런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존의 말에 유신은 진지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예까지 먼 걸음을 하셨으니 며칠 금성에서 지내며 계림의 화랑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려보구려.

 

마침 나라에서 문무제를 지낸다고 하니 가야 사람의 기백도 차제에 여실히 보여주시고들.”

“그럽지요.”

말을 마치자 유신은 다시 말잔등에 훌쩍 뛰어오르더니

 

지축이 떠나갈 듯 우렁찬 소리로 운집한 청년들에게 소리쳤다.

“들으라! 누가 눌최와 벌구를 땅에만 묻으려 하는가!

 

생전에 눌최는 꽃과 바람을 좋아하고, 사귀는 사람의 출신과 존비귀천에 초연했으며,

 

한번 맹세한 것은 비록 잘못된 것일지언정 끝까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봉잠성 성루에 높이 앉아 군사들을 부릴 때 적의 손에 목을 잃고도

 

손에서 절도봉을 놓지 않은 얘기를 들은 일이 있는가?

 

그 절도봉을 눌최는 지금도 썩은 뼈로 단단히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벌구는 또한 어떠한가?

 

그는 태생조차 알 바 없는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그 상전이 하는 일이면

 

지옥까지도 따라갈 곧은 신념으로 일생을 충직하게 살았다.

 

그대들은 생선처럼 토막난 벌구의 참혹한 뼈를 보았는가?

 

그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저토록 처참한 몰골이 되었던가!

 

무엇을 지키려고 귀중한 목숨을 미련 없이 적의 손에 내어주었단 말인가!”

석양을 안고 선 유신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듯 장엄하게 이어졌다.

 

웅성거리던 청년들은 거한의 피맺힌 절규에 입을 다물었고,

 

더러는 고개를 떨군 채 숙연해지는 자도 있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우리는 모조리 투사가 되어야 한다.

 

수백 명의 눌최와 수천 명의 벌구가 마침내 이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

 

벗은 계림을 지키는 귀신이 되었거니와 이제 그 맺힌 원한을 푸는 일은 살아 있는 우리 몫으로 남았다!

 

가슴을 열고 죽은 두 장부의 뜨거운 얼과 혼을 마음 깊은 곳에 다시 묻으라!

 

만일 작은 일로 다투거나 출신을 가지고 따지려는 자가 있다면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

 

금일부터 한 달간 문무제를 여는 것은 눌최와 벌구의 귀향을 축하하는 흥겨운 잔치다.

 

여기 모인 계림의 장부들이여,

 

그대들은 평소에 갈고 닦은 기량을 눌최와 벌구가 보는 앞에서 마음껏 발휘하라!”

금성에 상수로 오느라 그만두긴 했지만 한때는 화랑을 가르쳤던 국선의 말이었다.

 

또한 유신으로 말하면 눌최가 속한 용화향도의 화랑이니

 

여염의 장례로 치자면 상주 격이었고, 풍월도의 역사를 통틀어 18세에 국선이 된 경우는

 

유신이 처음이라 화랑들에게는 최고의 우상이었다.

 

게다가 친가로는 가야 왕실의 적통이요,

 

외가로는 신라 왕실의 후손이므로 양측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잠시 양편으로 나뉘어 싸우던 청년들은 유신의 절규에 감복해 서둘러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뭉쳤다.

 

한 달 밤낮, 서라벌을 뜨겁게 달군 문무대제는 이런 곡절 끝에 시작되었다.

화랑과 낭도들은 검술과 창술을 겨루고, 공지 한편에선 마상 무예가 펼쳐졌으며,

 

낭산 들머리 언덕바지에선 궁술 시합이, 그리고 명활성 밖에서는 편을 갈라

 

공을 차는 축국(蹴鞠) 대회도 열렸다.

 

글에 능한 이는 시문을 지어 두 의인의 충절을 기렸고, 악기를 배운 이는 음악을 연주했는데,

 

각 행사장마다 조정에서 술과 떡을 보내고 임시로 장설간을 지어 궁중 나인들로 하여금

 

밥과 국을 끓이게 했다.

 

장례식장의 침울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신명나는 잔치 마당으로 변했다.

 

눌최가 몸담았던 용화향도 40여 명은 김유신의 명에 따라 행사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중을 들거나 음식을 날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