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0
이렇듯 유신에 대한 춘추의 감정은 추억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같은 남자로서 다소의 질투심이 뒤섞인 꽤나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가 무척 궁금했다.
이미 계림의 전설이 된 해론과 눌최를 감안하면 그들의 우두머리 김유신은 보지 않아도
그 자질과 그릇의 크기를 능히 짐작할 만했지만 그럴수록 궁금증이 발동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자신의 나이 스물다섯, 이제쯤은 나이 차이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객관적인 관찰과 판단이
가능하리라는 게 춘추의 생각이었다.
심부름을 갔던 자는 좀체 나타나지 않았고 장지를 울리는 함성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아마도 양측의 무예가 막상막하인 모양이었다.
싸움을 말려보겠다고 분주히 뛰어다니던 중신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통하지 않자
시류를 한탄하며 혀만 차댔고, 급기야 목을 길게 빼고 싸움을 구경하는
얼빠진 이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밥 한 솥 지어낼 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화주의 심부름을 갔던 이가 뒤에 거한(巨漢) 한 사람을 달고 저만치에 모습을 나타냈다.
춘추가 보니 거한은 애도의 표지인 흰색 복두에 누빈 방포를 입고, 윤이 나는 수염을 멋들어지게
길렀는데, 그 기상과 풍모가 단연 출중하여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 모습은 어릴 때 만노군 들머리에서 본 것과도 사뭇 달랐고,
8, 9년 전 유신이 상수살이를 하게 되었다며 자신의 집으로 인사를 왔을 때의 모습과도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니 용화랑! 어디를 가셨다가 이제야 오셨소!”
화주가 저승 문턱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양 반색을 하자
유신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상수관에 점고를 맞고 오는 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춘추는 무엇에 홀린 듯한 눈으로 그런 유신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짧은 겨울 해가 바쁘게 서산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그 붉은 노을이 유신의 얼굴이며 누빈 방포에 잔물결마냥 어른거렸다.
화주로부터 사단의 전말을 묵묵히 듣고 섰던 유신이 이윽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부탁이오, 저 무모한 싸움을 좀 뜯어말려주오!”
화주가 애걸하듯 덧붙였다.
유신은 청년들이 뒤엉켜 함성을 질러대는 곳으로 눈길을 한번 주었다가,
“살매현의 천존이 예까지 왔다니 가서 인사는 해야겠구나.”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막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가 화주 등뒤에 앉은 법사 원광을 발견하고 허리를 굽혀 절했다.
원광이 어린애처럼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서천 노을이 오늘따라 장히 좋네!”
하며 손을 흔드니 유신도 덩달아 웃으며,
“노을이 아무리 좋기로 해 돋는 장관만 하오리까.”
하고 응수했다.
법사가 다시 파안대소할 적에 유신은 원광의 곁에 나란히 앉았던 춘추와도 비로소 눈길을 맞추었다.
석양을 안고 선 유신의 자태는 춘추의 눈에 흡사 하늘에서 방금 하강한 신장(神將)의 모습처럼
신비롭게 비쳤다. 시선과 시선이 교차하는 그 짧은 순간,
춘추는 중국에서 같이 지내던 당황제 이세민과 장군 이정을 동시에 떠올렸다.
그가 대륙에서 사귄 사람 가운데 영웅의 풍모로는 이세민을 따를 자가 없고,
장수의 기상을 논하자면 이정만한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두 사람도 유신에 비해선 오히려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춘추 도령이 아니시오?”
장대한 풍모와는 달리 춘추를 대하는 유신의 음성은 부드러우면서도 다정했다.
그때까지 유신의 헌걸찬 풍모에 경도되어 인사조차 못한 춘추가 황급히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고맙소. 이번 눌최의 일로 도령께 대은을 입었소이다.”
“대은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저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어 춘추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화주가 유신의 팔을 잡아끌며 촉박하다고 재촉이 심하였다.
그러자 유신은 나무등걸에 매둔 화주의 말잔등에 훌쩍 올라타더니
내처 말 배를 걷어차며 싸움이 벌어진 곳으로 바람같이 내달았다.
시초만 해도 싸움판은 그야말로 살벌한 격전장이었다.
처음에는 천품과 진주가 창칼로 자웅을 겨루었으나 40여 합이 넘어서도록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
천품은 겉으로 호통을 치며 꾸짖었지만 내심 어린 진주의 칼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진주 역시 처음 에는 욱기로 덤벼들었으나 천품의 무술이 워낙 절륜하니 갈수록 겁이 났다.
이를 알아차린 죽지가 칼을 뽑아 들고 달려나와 진주와 합세하자 구경하던 천존도
당연히 아우를 거들었다.
그렇게 네 사람이 뒤엉켜 다시 10여 합을 싸웠다.
실로 그림 같은 손놀림이요 신기(神技)에 가까운 무예였다.
빈틈이 엿보이면 여지없이 예봉이 파고들었고, 또한 그 예봉을 어김없이 막아내는 칼끝이 있었다.
마치 살아 저절로 움직이듯 날과 날이 허공에서 맞닥뜨릴 때마다 사방으로 불꽃이 튀고 열광하는
구경꾼들의 함성이 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양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일이 그쯤 되면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다음에야 당초 가졌던 전의와 투지가
반감되게 마련이었다.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마음보다는 본때를 보여 버릇을 가르치려고 시작한 싸움이 아니던가.
그런데 합이 거듭되고 실력이 드러날수록 놀라움과 공경심이 일고 심지어는 잘못하여 몸이라도
상하면 어떡하나, 오히려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까지 생겨나니
그렇게 마지못해 하는 싸움이 시초와 같을 리 없었다.
네 사람 마음이 모두 그랬다.
그래서 만일 누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이는 계림의 큰 손실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넷이 뒤엉켜 10여 합을 겨룬 뒤부터는 싸움의 열기가 갑자기 뚝 떨어졌다.
서로 공격을 미루고 눈치를 볼 때가 많았고, 허점이 보여도 공격하지 않는 수가 태반이었다.
다만 이들이 멈추지 못한 것은 자신들을 응원하는 구경꾼의 함성과 수시로 터져나오는
요란한 박수소리 때문이었다.
굽지도 접지도 못할 곡경에 빠져 개신개신 싸우는 흉내만 내고 있을 때였다.
홀연 저만치에서 누군가가 쏜살같이 말을 몰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싸우던 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방을 그치고 달려오는 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말잔등을 타고 앉은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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