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8
“노형은 버릇없는 말투와 공허한 주장을 당장 거두지 못하겠소?
도대체 누가 아직도 신라인, 가야인을 논하며,
그러잖아도 흉흉한 민심에 또다시 억지 낭설로 이간질을 시킨단 말이오?”
천존에게 쩔쩔 매던 화주가 돌연 반색을 하며,
“오, 죽만랑!”
하고 알은체를 했다.
6척 거구에 나이는 스물예닐곱쯤 되었을까.
목을 가린 수염에 흰 복두를 쓴 진골 젊은이 하나가 천존의 앞까지 와서 장승처럼 버티고 섰다.
“그대는 누군가?”
천존이 실눈을 뜨고 묻자 거구의 청년이 대답했다.
“나는 전조에 하슬라주 군주를 지낸 술종(述宗) 공의 아들 죽지(竹旨)로 풍류황권에는 죽만이라
이름이 올라 있소.”
그렇게 자신을 밝힌 청년은 노기가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따지듯이 말을 이었다.
“금관국 없어진 지가 1백 년 세월에 가깝고 나머지 5가야(五伽倻)도 망한 지 벌써 60년이 넘었소.
신라 조정에서는 가야국을 병탄한 뒤 백성들의 구분이 없어진 것을 왕명으로 공포하였고,
왕족과 대신들에게는 진골 벼슬을 내려 본래 다스리던 향읍을 주었으며,
오히려 신라 백성들에게서 거둔 세전으로 가야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까지 했소.
국선이 되고도 미관말직조차 얻지 못하는 것은 근년의 정사가 황폐한 탓이지
그것이 어찌 가야국 후손들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일이겠소?
보아하니 노형은 글깨나 배운 사람인 듯한데,
우리 계림의 젊은이들이 이런 기회에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어떻게든
나라와 사직을 지킬 궁리를 해야지 서로 헐뜯고 시샘하는 쪽으로 끌고 가서야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이오?
쇠잔한 국력과 그릇된 정사를 성토하고 땅에 떨어진 군율을 비난하는 것은 나 또한 찬성이지만,
있지도 않은 신라인과 가야인을 구분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말에는 참을 수가 없소!
그건 이간질이외다!
그러잖아도 가뜩이나 어지러운 형편에 민심을 자꾸 갈라놓지 못해 안달하는 저의가
도대체 무어란 말이오?”
몹시 흥분한 청년은 여차하면 주먹이라도 휘두를 태세로 천존의 턱밑을 파고들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또다시 함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천존이 말했을 때 잠자코 있던 무리들 의 반응이었다.
천존은 잠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지라고 하였던가?”
“그렇소이다!”
“그대는 기껏 글줄이나 배워 책에서 전조의 역사만 읽었을 뿐
산곡간의 백성들이 실제로 어떻게들 사는지 그 참상은 구경하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천존이 반말투로 무시하듯 묻는 말에 청년은 더욱 속이 뒤틀리는지,
“나도 알 만큼은 알고 볼 만큼은 보았소.”
하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래, 볼 만큼 본 자가 신라인과 가야인이 갈수록 서로 더 대립하고 배척하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법흥 진흥 양대에선 비록 왕명이 서고 유화책이 통하여 가야의 망국대부들에게도 벼슬과 녹읍이
내렸지만 그 뒤로 가야인 벼슬아치들이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 눈여겨보았던가?
그대의 말처럼 신라인들은 입만 열면 가야 백성들을 지켜주고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신라의 국운이 쇠퇴하였고,
결국 가야인들 탓에 신라가 망할 거라고 지껄이는 신라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본 바가 있는가?
신라인은 가야인과 혼인을 꺼려한 지 이미 오래요,
어떤 마을에선 가야인이 사는 집에 금줄을 쳐놓았으며,
가야인들에게는 양식도 꾸어주지 않는 일이 허다하고,
심지어 주막에서 가야인을 만나면 재수가 없다고 상을 돌려 앉는 자까지 생겨났다.”
천존이 산곡간의 실상을 털어놓자 그의 뒤에 있던 일패의 청년들 사이에서,
“그럼, 그럼!”
“속이 다 후련해!”
“똑바로 들으라구, 이 물정 모르는 신라 아이야.”
하는 말들이 왁자하게 흘러나왔다.
죽지는 안색이 붉게 변했지만 천존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설움을 당하면 끼리끼리 뭉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그 바람에 가야국 후손들은 최근 부쩍 하주나 금관주, 대야주 등지로 몰려들었고
망국의 전통과 습속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
정사가 문란하고 나라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세간에선 신라인과 가야인의 구분이
종이와 먹물처럼 명징해졌고, 국토는 하나일지 몰라도
민심은 법흥왕 이전으로 되돌아간 지 이미 오래다.
엄연히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데 무엇이 이간질이며, 어떤 것이 잘못되었더란 말이냐?”
천존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일패의 청년들이 다시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닥쳐라, 이 허무맹랑한 가야놈아!”
그때, 죽지의 등뒤에서 또 한 청년이 욕설을 퍼부으며 뛰어나왔다.
죽지보다 훨씬 어려 뵈는, 17, 8세 정도의 미소년이었다.
“네 어찌 간사한 망발로 우리 화랑을 능멸하고 미혹한 논리로 나라와 민심을 해치려드는가!
너 같은 놈은 살려둘 수 없다! 반드시 그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몸에서 떼어놓고 말리라!”
소년은 미처 만류할 겨를도 없이 칼을 뽑아 들고 천존에게 달려들었다.
돌발 사태를 만난 죽지가 크게 당황하며,
“진주(眞珠)야!”
하고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소년의 칼끝은 천존의 가슴을 향해 매서운 기세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아까부터 죽지를 응원하던 청년들이,
“잘한다!”
“죽여라, 죽여!”
하고 어린 소년을 두호해 고함을 질렀다.
눌최의 장지에 운집한 화랑도의 무리는 어느 순간부터 명확하게 두 패로 나뉘었다.
비록 숫자와 규모는 달랐지만 천존을 응원하는 쪽과 죽지를 응원하는 쪽으로 세가 극명하게 갈라졌다.
천존이 소년의 칼끝을 가볍게 피하며 뒤로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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