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7

오늘의 쉼터 2014. 9. 15. 21:02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7

 

 

 

병술년 해 끝,

 

신라 조정은 길일을 택해 눌최의 가묘에서 성대한 장사를 지내고 그 옆에 따로 벌구의 무덤도 지었다.

나라에서는 장지에 구름같이 모여든 화랑과 낭도들에게 밥과 술을 내어 대접했으며,

화주(花主)는 용화향도 눌최의 이름을 풍류황권에 귀산, 추항, 해론 등과 나란히 적필(赤筆)로 적고

그에게 급찬 벼슬을 내린 임금의 전지를 큰 소리로 낭독하였다.

가실사에서 화랑들을 훈육하던 법사 원광이 노구를 이끌고 친히 와서 조문하고 젊은이들에게

눌최의 임전무퇴 정신을 본받자고 역설했고, 역대 국선을 지낸 이들도 빠짐없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하관과 평토가 끝나고 봉분이 높이 다져진 뒤에 화주가 단상에 올라가서,

“나라에서는 고인들의 숭고한 유지를 기려 오늘부터 한 달 밤낮을 애도 기간으로 정하고

조정 대신들이 참관하는 문무대제를 열기로 하였소.

그대들이 있는 한 무엇을 겁낼 것이며, 설혹 구적(寇賊)이 한꺼번에 쳐들어온들 근심할 일이 무엇이겠소. 낭도들은 평소 갈고 닦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해 좁게는 개인의 영달을 꾀하고 나아가 이 나라

풍월도의 늠름한 기상을 만천하에 보여주시오.

이번에 입선하는 이들에겐 필히 벼슬을 내리고 관직으로 등용하라는 대왕 전하의 성지가 내리었소!”

하고 소리쳤다.

산 자들이 죽은 자를 이용하는 것은 고금이 한가지던가.

국운이 점점 쇠잔해가던 신라로서는 황폐한 민심을 추스르고 청년들의 실추된 사기를 진작시킬

뚜렷한 전기(轉機)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차에 전국의 화랑도들이 모처럼 한곳에 결집하고, 백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동료의 시신을

대하며 한결같이 분노와 적개심에 흥분할 게 뻔하니 조정에서는 그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어떻게든 침울한 분위기를 흥겨운 잔치마당으로 끌고 가서 조정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실의에 빠진 민심을 뜨겁게 달구어보자는 게 노회한 중신들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화주의 말에 크게 고무될 줄 알았던 화랑도의 반응은 뜻밖에도 시큰둥하고 냉랭했다.

환호를 지르며 환영하는 이들은 절반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비소를 머금고 코방귀를 뀌거나

아예 야유를 퍼붓고 욕을 하는 이까지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화주는 크게 당황했다.

바로 그때 무리 가운데 늠름하게 생긴 한 장정이 나서서 떠나갈 듯 큰 소리로,

“화주는 우리의 분노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지 말라!

눌최가 과연 누구 때문에 저토록 참혹한 몰골이 되었는가?”

하며 고함을 질렀다.

“우리가 격분하는 것은 눌최를 저 지경으로 만든 이 나라의 허약한 국세와 무능한 정사이며,

성이 함락될 줄 뻔히 알고도 구원을 포기한 오합지졸의 군대다!

더군다나 이 나라에선 전쟁에 참패하고도 책임을 지는 자가 아무도 없다!

지금 조정의 녹봉을 받는 문무 백관들은 마땅히 사직을 청해야 옳고,

거타주를 구원하지 못한 귀당, 법당, 서당의 5군 패장들은 스스로 자결하여

추락한 군율부터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화주가 소리나는 곳을 보니 나이는 서른쯤 돼 보이고 생김새는 글 하는 선비에 가까운데,

웬만한 화랑들과는 면을 익힌 그로서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게다가 갈옷에 칼 한 자루만을 달랑 들고 있어 외양만으로는 신분을 점칠 수도 없었다.

장정의 매서운 질타가 끝나자 그의 주변을 둘러싼 2, 30명의 청년들이 일제히 환호를 올렸고,

그 환호는 냉랭한 반응을 보이던 절반 가량의 젊은이들에게 급속히 퍼져나가 여기저기서

박수가 우렁차게 터져나왔다.

“그렇게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당황한 화주의 질문에 장정은 의연히 대답했다.

“나는 살매현에 사는 가야인으로 이름은 천존(天存)이다!

비록 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린 일은 없지만 뜻을 함께하는 벗들과 산천을 누비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무예를 연마한 지 이미 오래요,

지난 계미년 겨울 늑노현을 침공한 백제가 우리 살매현을 어지럽힐 때는

몸소 전장에 뛰어들어 위험에 빠진 우리 장수를 구하고 나라에 적잖은 공도 세웠다!

화랑은 아니지만 그런 말쯤은 할 자격이 있으니 화주는 너무 고깝게 여기지 말라!”

장정의 대꾸가 끝나자 또다시 사방에서 왁자지껄한 함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장정에게 환호하는 이들은 대개 조정의 처사에 불만을 가진 축들과 가야 출신의 젊은이들이었다.

예기치 못한 반응 이 계속되자 화주는 낯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하면 혹시 무은 장군이 말하던 살매현의 형제 장수가 바로 그대인가?”

당황한 중에도 화주가 들은 말이 있어 물으니

장정은 비로소 흥분한 반말투를 버리고 약간 눅은 어조로 대답했다.

“살매현 형제 장수라면 나와 내 아우인 천품을 일컫는 말이오.”

“늑노현을 구원한 공이 그대에게 있음을 알고 조정에서 얼마나 찾았는지 모르오.

어찌하여 그대는 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소?”

이에 장정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이름을 올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본래 진흥왕이 풍월도를 만들 적에는 나라에 유익한 양신과 명장을 기르기 위함이었는데,

그 후로 당초의 뜻이 어지럽게 변색되어 근년에 이르러선 화랑으로 이름을 드날리고

비록 국선이 되어도 미관말직조차 얻지 못하는 이가 태반이 아니오?

신라 사람도 그런 형편인데 하물며 나는 가야인이오.

가야인으로 벼슬을 사는 예가 하주 군주 김서현공을 빼고는 경향을 통틀어 또 누가 있더란 말이오?”

그때였다.

 

운집한 청년의 무리 가운데 또 한 사람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