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5
“그대는 생전에 내 아우 헌을 만나거나 본 일이 있었던가?”
“없습니다.”
“하면 어찌하여 생면부지의 사람이 죽었는데 빈소에서 그토록 섧게 통곡하였던가?”
“두 가지 일로 설움이 북받쳤나이다.”
“그것이 무언가?”
“하나는 고인께서 전날 백공을 얻어갈 적에 가잠성의 일을 극구 사죄하며 어떻게든
양국의 화친을 위해 애쓴 행적을 들어 알기 때문입니다.
고인과 같은 분이 살아 계셨을 때에도 양국이 걸핏하면 군사를 내는 판인데
한창 뜻을 펼 나이로 졸연 유명을 달리하시니 장차의 일이 어찌 걱정스럽지 않을 것이며,
고인의 죽음이 어찌 서럽지 않으오리까.
급작스런 고인의 타계는 백제뿐 아니라 우리 신라로서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래 큰 못의 물이 마르면 그 속에 살던 수많은 미물들이 덩달아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고인을 따라 죽어갈 양국 접경의 불쌍한 백성들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쏟아졌나이다.”
장왕과 백제의 신하들이 느끼기에 청년이 구사하는 화법은 얄미울 정도로 영악했다.
결코 예의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실은 섬뜩한 독설이요, 겉으로 드러난 말을 들어보면
분명히 부여헌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한데 감춰진 뜻은 자신들을 비난하고 질책하는 것이며,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다 듣고 나면 어김없이 뒤에 남는 것은 심한 부끄러움과 모멸감이었다. 청년은 무슨 까닭에선지 잠시 말허리를 끊고 머뭇거리다가 다소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지난 갑신년에 거타주를 지키다가 순국한 저의 절친한 두 벗이 떠오른 까닭입니다.
이는 사사로운 일이라 더 드릴 말씀은 아니오나 다만 그 둘의 유골이 아직 백제 땅에 있고,
제가 조위사로 백제 땅을 밟게 되었으니 사람의 정리로 어찌 비통한 감회가 없으오리까.
사감을 공무에 섞은 것이 허물은 허물이지만 대왕께 진심을 숨긴다면 더 큰 죄를 짓는 일이 될까
추호도 거짓 없이 아뢰오니 부디 넓은 도량으로 헤아려주십시오.”
언제부턴가 청년에게 넋이 팔려 한참을 물끄러미 보고 앉았던 장왕이 잔뜩 누그러진 태도와
온화한 말투로 물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며 신라에서는 무슨 벼슬로 있는가?”
“저는 아직 벼슬이 없사옵고 이름은 김춘추라고 합니다.”
김춘추라는 말에 장왕을 비롯한 백제의 중신들은 약속이나 한 듯 크게 놀랐다.
“하면 혹시 용춘공과 천명 공주의 아들인가?”
“그렇습니다.”
“내 일전에 언뜻 듣기로 춘추는 당나라 장안에 숙위로 있다던데?”
“귀국하고 시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틀림없는 김춘추렷다?”
왕이 대경실색하며 거듭 확인하자 춘추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뜻밖에도 저를 알아보시니
기왕 예까지 온 김에 이모님을 뵙고 갔으면 합니다.”
하고서,
“만일 대왕께서 제 소청을 허락해주신다면 저는 난생 처음으로 이모님을 뵙는 것이며,
신라 왕실과 또한 저의 어머니께도 다시없는 선물이 될 것입니다.”
하고 청하였다.
춘추가 객관으로 물러가자 개보를 위시한 중신들은 순번을 다투며 춘추를 죽여 없애자고 극력 주청했다.
“춘추라는 자는 살려서 돌려보내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인물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아직은 나이가 어려 중책을 맡지 못했지만 만일 저런 자가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여 신라 임금을
보필하게 된다면 예측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게다가 그의 볼품없는 외모는 뜯어볼수록 기인의 상이 틀림없습니다.”
“신라왕은 적자가 없으니 김춘추라고 왕이 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김춘추가 조위 사절로 우리나라에 온 것은 실로 전하의 홍복이요,
나라의 앞날에 커다란 행운이올습니다.
마땅히 그를 죽여 백제의 왕업을 더욱 돈독히 하심이 옳을 줄 압니다.”
중신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에도 장왕은 별다른 반응이 없이 종내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조문 사절로 온 사람을 죽여 없앤다면 과인은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만세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왕이 고개를 젓자 병관좌평 해수가 나섰다.
“신인들 어찌 사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고금의 상규를 모를 것이며,
모시는 임금이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기를 바라겠나이까.
하오나 전하!
사신을 죽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사직의 앞날은 영원합니다.
오늘 보니 김춘추는 결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닙니다.
추측컨대 그는 우리 해동증자(海東曾子)와 엇비슷한 나이가 아닐까 합니다.”
해수가 말한 해동증자는 왕의 장자인 부여의자(扶餘義慈)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장왕 내외가 용화산 화적촌에 있을 때 낳은 의자가 어느덧 장성하여 이때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는데,
그는 자라면서 용맹스럽고 담대할 뿐 아니라 어버이를 효도로써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롭게 지내므로
사람들로부터 해동증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왕이 춘추와 의자를 비교해 말하는 해수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잖아도 장왕 역시 아까부터 그들 두 젊은이를 마음속으로 비교해보고 있던 터였다.
“그러하옵니다. 해동증자께서 훗날 마음껏 뜻을 펼 수 있도록 앞길을 열어주는 것도
지금의 왕업 못지않게 중한 일입니다.”
개보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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