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4
그로부터 얼마 뒤다.
아우를 잃고 실의에 빠져 지내던 장왕에게 국경에서 급파한 상신(上申)이 당도했다.
신라에서 부여헌의 조위사(弔慰使)가 수레에 부의까지 싣고 나타나 입궐을 청한다는 거였다.
예상 밖의 소식에 접한 장왕은 이내 의아하고 해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신라에서 이를 갈고 있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조위사를 보냈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구나.”
장왕은 개보를 불러 물어보았으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일을 개보인들 알 턱이 없었다.
“어쨌거나 해가 될 일은 없으니 조위 사절을 만나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개보의 말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신라에서 온 사신을 궐로 불러들이라고 명했다.
조위사로 온 이는 용모가 볼품없고 체구가 작달막한 약관의 청년이었다.
그는 수레에 싣고 온 부의를 진상한 뒤 별궁 한편에 따로 마련된 부여헌의 빈소에 가서
두 번 절하고 홀연 목을 놓아 통곡했다.
실로 종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라에서 조문을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판국인데
하물며 조문을 온 자가 구슬피 울며 진심으로 슬퍼하는 기색까지 보이자
혹 무슨 수작이 있나 싶어 청년을 뒤따라왔던 장왕의 신하들은 저마다 안색이 변하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부여헌의 빈소에 엎드려 청년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까스로 울기를 마친 청년이 들고 온 보자기를 풀어헤치고 향을 꺼내 불사른 다음,
“왕생극락하시오.”
또 한번 울먹이는 소리로 경건히 예를 표하고 돌아섰다.
백제의 중신들은 조문을 끝낸 청년을 장왕이 있는 어전으로 데려갔다.
청년이 오기 전에 이미 신하들을 통해 별궁 빈소의 일을 소상히 들어 알던 장왕은
더욱 궁금하고 괴이쩍은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다.
“그래, 조문은 마쳤는가?”
장왕이 청년을 향해 온화한 말투로 묻자 작고 못생긴 청년이 공손히 국궁하고 답했다.
“이웃 나라에 상사가 난 지 오래이나 진작에 조문을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더구나 양국의 임금으로 말하면 사사롭게는 옹서지간이요,
귀국은 사위와 딸의 나라라 마땅히 일찍 조의를 표하고 부의를 보냈어야 도리인데
계림의 사정이 여의치 못해 큰 결례를 범하였나이다.
대왕께서는 부디 해량하소서.”
비록 인물은 볼 게 없었지만 왕은 청년의 말하는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마음에 든다고 의심까지 거둘 장왕이 아니었다.
“예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짐은 그대가 사비에 온 뜻과 그대 나라의 처사를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무엇을 가지고 말씀하시는지 조금 소상히 하문하여주십시오.”
“우선 우리와 신라는 누대에 걸친 철천지원수의 나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과 얼마 전에도 서로 피를 흘리며 필사의 결전을 벌인 터요,
근년에는 짐이 거의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신라에 뺏긴 우리 의 옛 땅과 성을 되찾았다.
또한 그대의 말처럼 백제의 왕후가 비록 신라의 공주였다고는 하나 그 역시 인연을 끊은 지
이미 오래라 부녀간이나 옹서간을 논하며 예를 갖출 형편이 아니다.
짐이 알기로 금성에서는 지금쯤 눈에 핏발을 세우고 우리를 향해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어야 마땅하거늘,
도리어 조위사에 부의까지 실어 보내다니
이는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다른 꿍꿍이가 있음이 명백하다.”
장왕은 근엄한 어조로 단언하며 시종 눈빛을 매섭게 하여 청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왕의 예상과는 달리 청년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대는 정녕 무엇 때문에 왔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말하라.
만일 조금이라도 짐을 현혹하고 우리 조정을 기만하려 한다면 비록 아름다운 일로 왔을지언정
용서하지 않으리라.”
왕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청년이 공손히 국궁하고 입을 열었다.
“신라와 백제는 서로 지경을 접하고 이웃하여 내려온 지 무릇 기백 년입니다.
그 수백 성상이 지나는 동안에는 지금처럼 시운이 불우하여 군사를 내고 창칼로써 다툰 적도 있었지만
또한 굶주린 백성들의 먹을 식량을 보내주고 사직이 위태로울 때는 원군을 내어 도운 예도 허다합니다. 굳이 지난날을 돌아보자면 귀국의 독산성 성주가 백성 3백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해 왔을 때
우리 내물 대왕께서는 이들의 식읍을 보살펴주시고 6부의 땅에 나누어 살게 했는데,
귀국 근초고대왕께서 서신으로 이르시기를, 양국이 서로 화친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으나
도망한 백성을 거두는 것은 예의에 어그러진 일이므로 그들을 붙잡아 돌려보내달라 했습니다.
이에 우리 내물 대왕께서는 흔히 백성들은 바람이나 물과 같아서 마음이 동하면 살고 싶은 곳을 찾아
자유롭게 오고가는 법이므로 너무 책망하지 말라고 권유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후에 양국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또한 눌지왕조에는 귀국의 비유대왕과 서로 흉금을 터놓고 지냄이 한배에서 난 형제와 같았고,
수시로 말과 흰 매, 황금과 명주가 양국 사신을 통해 분주하게 오갔나이다.”
청년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백제를 쳐 개로대왕이 붕어하고 사직의 존망마저 위태로웠을 때
우리 자비대왕이 1만 원군을 보내 태자를 임금으로 세운 일이 있고,
그 일로 고구려와 우리가 척을 지게 되었는데, 수년 뒤 거련이 다시 신라를 치자
귀국의 동성대왕이 원병을 파견해 북적(고구려)을 크게 물리쳤으니
의와 덕으로 이웃을 섬긴 예가 어찌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겠나이까.”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양국의 지나간 역사를 흡사 제 눈으로 본 듯이 들춰내니
왕과 백제의 신하들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대는 순전히 그런 것들만 연구한 모양이구려.”
임금의 가까이 시립했던 개보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참견하자
청년은 개보를 쳐다보지도 않고 장왕에게 말했다.
“유사에 남은 미담을 꼽자면 밤을 새워도 부족할 바이나
지금은 조문을 온 마당이라 돌아가신 고인과 얽힌 일을 한 가지만 더 말하겠습니다.
전날 고인이 백공을 청하는 대왕의 간곡한 서찰을 지니고 금성에 왔을 때 본조의 신하들 중에는
이를 나쁘게 말하고 심지어 수족을 잘라 돌려보내자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당시는 가잠성을 잃고 난 직후라 그런 주장이 썩 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오나 우리 임금께서는 양국의 아름다운 전통과 옹서국의 예를 거론하시며 고인 일행을
융숭히 대접하였을 뿐 아니라 돌아갈 때는 비난의 여론을 뿌리치시고 백공까지 딸려 보냈던 것입니다.
감히 여쭙습니다.
대왕께선 설마 고인이 금성에 다니러 왔을 때의 일을 잊어버린 건 아니시겠지요?”
청년의 질문에 장왕은 기가 차서 빙긋이 웃음을 내었다.
“잊지 않았네. 덕분에 미륵사 공역이 아주 잘 되었어.”
그러자 청년은 비로소 내신좌평 개보에게 눈길을 돌리고서,
“자고로 성군을 보필하는 신하는 덕이 있어야 하는 법이오.
비록 근년의 정사가 어지러워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고는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금시(今時)의 일로,
7백 년에 걸친 양국의 오랜 역사에서 보면 실로 숨 한 번 쉬고 손바닥 한 번 칠 동안입니다.
외람된 청이오나 모쪼록 대왕을 잘 보좌하여 덕치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인의로써
삼한의 민심을 아우르기 바랍니다.”
하며 충고하였다.
빈정거린 말 한 마디의 대가치고는 돌아오는 말이 너무 혹독하여 개보가 떨떠름해진 입맛을 다시며
생전 처음 낯을 다 붉혔다.
그 모습을 재미나다는 듯 지켜보던 장왕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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