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협력(3)
(1620) 협력-5
크다. 김정산의 말을 듣고 나서 조철봉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운용해 왔던 화폐 단위를 뛰어넘어서 도무지 계산도 안 된다.
1억불이면 대충 1천억, 10억불이면 1조. 조가 뭔가? 1천억이 10개.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조철봉은 계산을 포기했다.
실감도 안 날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나빠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돈이 돈 같아야 말이지. 조를 도대체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그래서.”
김정산이 결론을 내듯이 말했다.
“우리도 대비를 해야 된단 말입니다.”
지금 김정산은 포이한테서 들은 일본 측의 조건을 말해준 것이다.
포이는 정보국 간부로 알고 있는 김정산에게 수시로 보고를 해오고 있다.
그때 잠자코 있던 강성욱이 입을 열었다.
“나도 상부에 보고를 하겠지만 중국이나 일본 규모를 당하기는 힘들겠는데.”
강성욱의 표정은 어두웠다.
중국은 30억불을 20년 거치 분할 상환 조건으로 내놓은 데다 무기를 35억불어치나
무상 원조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25억불 차관에다 25억불을 투자해서 자동차 공장을 짓는다.
조철봉은 소리 죽여 숨을 뱉었다.
크다. 그리고 몇 백만불 먹여서 될 일도 아니다.
이윽고 머리를 든 조철봉이 강성욱과 김정산을 차례로 보았다.
“내가 처음에 이 일을 맡았을 때는 두 분이 도와주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죠.
그랬다면 나 같은 놈한테 이 일이 맡겨질 리도 없었겠지만.”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보쿠동이라면 당연히 중국에다 유정 공급권을 줍니다.
한국하고 애초에 구두 약속을 했다고 해도 국가에 득이 된다면 두 말 않고 배신합니다.
국익이 우선이죠. 신의가 밥 줍니까?”
당연한 말이라는 듯 김정산이 머리를 끄덕였고 강성욱도 눈만 껌벅였다.
조철봉이 강성욱과 김정산을 차례로 보았다.
“우리도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몇 백만불 뇌물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곧 대책을 마련할 겁니다.”
하고 강성욱이 말했지만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입맛을 다신 강성욱이 말을 이었다.
“오늘 김 선생한테서 들은 내용을 바로 보고할 테니까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습니다.”
김정산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처음 시도하는 북남 협력 작전인데 꼭 성공해야 된단 말입니다.“
도청을 피하려고 오늘도 셋은 길가에 세워놓은 차 안에 앉아 있었는데
한낮의 프놈펜 시가지는 한산했다.
김정산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차 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 때 다시 만납시다.”
김정산이 나가고 둘이 되었을 때 강성욱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북한 측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건 좋은데 이거 우리 쪽에서….”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강성욱이 쓴웃음을 지었다.
“책임을 지고 이 작업을 맡으려는 부서가 없어서 말입니다.
우리 대장이 각 부서에 연락을 하고 있지만….”
당연한 일이다.
원래 7공구 유정 작업은 민간기업인 태우개발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의 계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유정이 개발되고 유급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갈 상황이 되자 누가 뒤늦게
이 일에 대한 부담을 떠맡으려 하겠는가?
아무리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해도 잘 돼야 본전이고 안 되면 몽땅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는
형편인 것이다.
부담 없이 달려든 중국이나 일본과는 사정이 다르다.
(1621) 협력-6
외교통상부 제3회의실 안, 오기만의 브리핑이 끝났어도 원탁에 둘러앉은 8명의 경제부처 차관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오기만도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앞쪽 벽만 보았으므로 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해졌다.
상황은 심각했다.
캄보디아의 제7공구 유정 공급권은 한국 태우개발이 개발해냈지만 중국이나 일본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그들이 캄보디아 정부에 제시한 조건은 엄청났기 때문에 기가 다 막힐 지경이었다.
차관들은 행정관료로 최소 20년 이상씩 정부 밥을 먹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최소한 일본 수준으로 조건을 내걸 수도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누가 헛기침부터 하더니 말했다.
“이거, 북한측에서도 우릴 돕는데 우리가 가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되건 안 되건 나서 봐야지.”
산자부 차관 안석호였다.
그러자 외교부 차관 구영만이 바로 말을 받았다.
“제가 장관께 보고하고 통상사절단을 급조해서 캄보디아에 가겠습니다.”
“그러신다면.”
하고 경제기획원 차관 홍규식이 나섰다.
“제가 경제단체장 앞으로 지급 공문을 띄워서 협조를 부탁하지요.”
“이거 총리께 보고를 해야겠는데.”
국무조정실장이 말했을 때 금감원 부원장이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대통령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오기만은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 원인은 나중에 분석하기로 하고 먼저 이 분위기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둔다면 누가 대통령께 달려갈지도 모른다.
뚜렷한 대책도 없이 그냥 보고만 받을 때의 황당함과 실망감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대통령이 그런 상황이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저, 이번 제7공구 작전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그 작전의 지휘체계가 수립되었으면 합니다.”
오기만의 말에 다시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때 오기만의 말이 이어졌다.
“시일이 촉박합니다.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정부 차원에서 밀고 있는데 우린 현지에 로비를 맡은
민간인과 남북의 요원만이 음성적인 활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옳은 말씀이오.”
먼저 나섰던 안석호가 동의했고 또 바로 구영만이 따랐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오기만이 알기로 이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오늘은 별일이었다.
뒤를 따라 모두 동의했으므로 사안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차관급 공직자는 실무통인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장관급이 열흘 걸릴 일을 5분에 끝낸다.
업무를 잘 알기 때문이다.
오기만이 명명한 ‘제7공구 작업’은 경제관계 차관급 회의에서 추진하기로 했으며
실무 지휘자는 만장일치로 국정원 제1차장 오기만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5일 후에 경제인연합회장인 오성그룹 박동규 회장이 1백여명의 경제계 인사를 이끌고
캄보디아를 방문하기로 잠정 계획안을 수립했으며 외교부 장관, 산자부 장관, 정통부 장관을
친선사절단으로 프놈펜을 방문하도록 해 제7공구에 대한 한국 정부측의 관심을 노골적으로
내보이기로 결정했다.
차관들이 장관들을 시키는 꼴이었지만 누구 하나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좀 성격이 터프한 안석호가 제 흥에 겨워서 한마디 한 것이 상황을 잘 설명한 셈이 될 것이다.
“까라면 까야지. 국가 대사인데.”
오기만은 지금까지 차관급 회의가 이렇게 화통하게 진행되는 꼴은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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