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24
“네 이놈 동소야! 너는 어찌하여 성과 백성을 버리고 너 혼자만 살겠다고 쥐새끼처럼 달아나느냐?”
갑자기 사방이 소란스러워지며 말을 탄 장수 하나가 땅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꾸짖었다.
동소가 깜짝 놀라 바라보니 언덕 위에는 복병들이 수도 셀 수 없을 만치 가득하였고,
자신을 꾸짖는 장수는 누군지 알 수 없으나 그 풍채며 기백이 소름 끼칠 만큼 당당하고 늠름했다.
그러나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 싶어 재빨리 장검을 뽑아 들고,
“너는 웬 놈인데 거지같은 것들을 데리고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느냐?”
제법 호기롭게 응수하였더니 그 장수가 껄껄 웃으며,
“이내 죽을 놈이 남의 이름은 알아 무엇하랴마는
혹시 저승에서 명부를 만들 적에 쓰일 데가 있을까 하여 특별히 일러주마.
나는 백제의 장수 부여사걸로 관산성에서 붕어하신 성대왕의 손자다.
영명하신 우리 대왕을 도와 계림을 토벌하고 비명에 가신 할아버지의 원한을 풀러 왔으니
어찌 너의 목을 베지 않겠느냐?”
말을 마치자 벼락같이 쌍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동소가 비록 칼끝이 매서운 사람이나 사걸에 댈 바는 아니었다.
본래 사걸의 무예는 남령에서부터 정평이 자자했던 것으로,
장왕이 혼자 만군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며 극찬한 망지보다도 오히려 한수 위였다.
양자가 말머리를 어우르며 교전한 지 단 3합 만에 동소의 머리는 주인을 잃고 비탈길을 따라
한참을 굴러갔다.
성주가 맥없이 죽는 것을 본 신라의 잔병들은 대부분 전의를 상실하여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려 했다.
그러나 사걸은 싸늘한 웃음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내 할아버지를 처참히 죽인 신라의 족속들이다!
싸움에서 패하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인데 무슨 염치로 살기를 바라는가?”
그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잔병들의 간청을 묵살하고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대왕 폐하의 지엄한 군령을 어찌 한 마딘들 어길 수 있으랴!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주살하라!”
백제의 복병들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신라군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동소를 따라왔던 잔병 2백여 명이 모두 불귀의 객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백제는 이 싸움에서 신라의 왕재성을 공취하고 성주 동소를 비롯한 7백여 명의 군사와
백성을 잡아 죽였으며, 성안의 마을을 차지하여 남녀 주민 수십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절반이 불에 탄 하림궁과 거의 흑지(黑地)로 변한 남문지의 논밭도 덤으로 얻은 풍성한
전리품이었다.
사냥터에서 돌아오자마자 낭보를 전해들은 장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만조의 문무백관들을 모두 거느리고 수천의 호위병사들로 장대한 거둥 행렬을 만들어
수십 년 만에 되찾은 낭성으로 행차하였다.
그리고 불에 그을려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하림궁 한편에서 밤낮으로 주연을 베풀며
장수들을 격려하였다.
왕은 특히 목숨을 구걸하던 신라의 잔병들을 모조리 잡아 죽인 사걸의 얘기를 전해 듣자
가까이 불러 친히 술잔을 권하며,
“이는 족숙공(族叔公)이 아니었으면 결단하기 어려웠을 일로 과인은 이제야
비로소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잠을 이루게 되었소.
나는 그간 관산성에서 붕어하신 증조부님의 일만 생각하면 잠자리에 누워서도
전신의 피가 역류하였는데,
과인의 한 맺힌 심사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분은 오로지 족숙공이 아닌가 합니다.”
하고 극찬하니 이 모습을 본 장수들은 한결같이 마음속에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맹렬히 불태우게 되었다.
이날의 화제는 자연히 왕의 귀신같은 책략과 용병술에 대한 얘기였다.
장수들은 앞을 다투어 왕의 지략을 찬탄하면서 계책의 신묘함과 용병의 절묘함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
그런데 주연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다.
만취한 신하들 틈에서 문득 한 젊은이가 일어나더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번에 대왕께서 내신 계책은 상책도 아니고 중책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하책이올시다.”
하고 방자한 소리를 지껄였다.
일순 흥겹던 술자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과 정적이 감돌았다.
장왕은 용안에서 웃음기를 거둔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고,
군신들도 약속이나 한 듯 굳은 표정으로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무엄하구나! 네 감히 어느 안전에서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대느냐?”
왕의 가까이 앉아 있던 병관좌평 해수가 눈알을 부라리며 꾸짖었다.
그래도 그는 사태가 심각한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성싶었다.
이미 인사불성이 된 듯 몸까지 비틀거려가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어른이 아이와 싸워 이기는 것이 무슨 계책이며,
산 범을 잡을 채비를 하고 가서 죽은 노루를 지고 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소?
대왕께서는 이번에 낭성 하나를 얻자고 모두 4천 5백이나 되는 군사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남역에 배치한 군사들까지 번거롭게 하였으니 그 숫자가 무릇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어찌하여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은 것이 아니란 말씀이오?”
그러자 보다못한 개보가 젊은이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흥수(興首)는 말을 삼가라!
오늘같이 흥겨운 날 어찌 종작없는 헛소리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느냐!”
너무 취해버린 탓이었을까.
좌평 개보의 꾸짖는 말도 흥수라는 젊은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히려 개보를 바라보며 말했다.
“게다가 화공만 해도 그렇지요.
기왕 낭성을 얻을 양이면 궁궐도 온전한 것을 얻는 것이 상책이요,
남문 밖의 불에 탄 들판도 곡식과 함께 얻었으면 더욱 좋았을 게 아니오?
계책의 근본은 작은 수고로 큰 이득을 보는 것인데 대왕께서는 큰 수고로 작은 이득을 보았으니
이를 어찌 하책이 아니라 할 수 있소.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이번만큼은 대왕의 계책이 명백히 그릇되었소.
만일 내가 꾀를 내었다면 깃발 수천 개만 가지고도 능히 온전한 낭성을 얻었을 것이오.”
주흥은 여지없이 깨져버렸고 신하들은 이제 더 이상 꾸짖지도 만류하지도 못한 채
조심스레 왕의 기색만 살폈다.
잠자코 있던 왕이 한참 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깃발로 어떤 상책을 낼 수 있었더냐?”
“곡향이 바라 뵈는 언덕에 수천의 깃발을 늘어놓고 시일만 끌며 기다렸으면
성의 형세는 저절로 어지러워져서 자중지란에 빠졌을 겁니다.
그때 성을 취하기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손쉬웠을 게요.”
“실로 허무맹랑한 소리다.
시일을 끈다고 어찌 가만있는 성이 자중지란에 빠진단 말이냐?”
“신라인들의 풍속에 8월 보름은 가배(嘉俳)라 하여 명절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상명절이올시다.
그때는 경향 각지의 여자들이 편당하여 길쌈한 것을 가지고 공적을 가리되,
진 편에서는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향민들이 모두 공터에 모여 춤과 온갖 놀이를
즐기며 회소곡(會蘇曲)을 소리 높여 부를 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들의 햇곡식을 거두어 밥을 짓고 떡을 하느라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에 들떠 있습니다.
또한 조정에서는 팔사(八祀)를 받들고, 각 고을에서는 중사(中祀)와 소사(小祀)를 지내므로
관리들은 봉제사에 정신이 팔려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개 이런 잔치를 하자면 제일 중한 것이 들의 곡식을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수천의 깃발을 늘여놓고 시일을 끌었다면 낭성 사람들은 감히 곡식을 거두러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안 나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연히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을 것이며, 이웃이나 푸네기간에도 마음과 뜻이 달라
성안의 공론은 두 가지로 일어났을 게 뻔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자중지란에 빠진 성을 얻기란 낡은 수레를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 하였으니
막상 성을 칠 때는 기백의 군사도 오히려 많았을 것입니다.”
흥수라는 젊은이의 말이 끝나자 장왕의 불그레한 용안에선 일순 곤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왕은 두 눈을 부릅뜨고 흥수를 노려보다가 불연히 술상을 뒤엎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저 허무맹랑하고 방약무도한 놈을 끌어다가 당장 목을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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