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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남역(南域)평정 21

오늘의 쉼터 2014. 9. 14. 16:37

제18장 남역(南域)평정 21

 

 

 

한편 연거푸 신라를 쳐서 톡톡히 재미를 본 장왕은 을유년(625년)에도 군사를 일으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제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고을마다 노랫소리가 흘러넘치고,

국고는 차서 식량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며, 군사들의 사기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집권 초기만 해도 왕의 신분을 트집 잡아 의심하고 반대하던 귀족들이 없지 않았으나

이제 백제에서 그런 사람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왕명은 곧 천명(天命)이었고 왕의 말 한마디는 그대로 법과 율령이 되었다.

백성들은 입을 열면 태평지절을 논하며 장왕을 일컬어 고금에 다시 보기 힘든 명군이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내치에 성공한 장왕이 그 여세를 몰아 주변국을 아우르고 영토를 넓히려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가을이 되어 추수가 끝나자 장왕은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군사를 소집하는 한편

이번에도 사신을 당나라로 파견해 조공하고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당의 개입을 미리 봉쇄하려 하였다.

당으로 조공 사절을 보내는 것은 장왕이 신라를 치기 직전에 늘 해오던 일이었다.

그런데 조공 사절이 백제를 출발하여 당나라로 가는 해역에서 그만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고구려의 선단 수십 척이 중국으로 통하는 뱃길을 가로막고 화포를 쏘아대며

공격을 해온 것이었다.

사신을 태운 배는 허겁지겁 뱃머리를 되돌려 겨우 생환할 수 있었지만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소식을 접한 장왕은 신라를 공격하려던 계획을 잠시 중단하고 선부에 말하여 급히 수군의 전력을

보강했다.

그리고 해전(海戰)에 유능한 굴안과 망지, 백기 등의 장수에게 선단을 이끌게 하여

사신이 탄 배를 호위하고서야 가까스로 당에 조공을 할 수 있었다.

이 바람에 을유년에는 신라를 공격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병술년(626년) 봄에 장왕은 다시 조공사를 보내 당고조 이연에게 진귀한 갑옷 한 벌을

바치려 했는데 역시 고구려가 길을 막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왕은 비로소 고구려의 존재를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아, 고구려가 어느새 남진을 꾀할 만큼 국세를 회복했더란 말인가!”

장왕은 돌연 근심 어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이는 자신의 예측보다 족히 사오 년은 앞당겨 맞은 상황이었다.

장왕의 탄식처럼 여수대전(麗隋大戰)을 치르느라 국력을 소진했던 고구려는
과연 이 시기를 전후해

북방 강국의 왕성했던 국세를 회복하고 다시금 강력한 남진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고구려왕 건무를 주축으로 한 남진파 신하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었다.

즉위 초부터 당나라 조정과 전례 없이 긴밀한 우호 관계를 구축해온 건무왕(建武王:영류왕)은

그로 말미암아 외침(外侵)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착실히 내치(內治)에만

힘을 쏟았다.

사실 건무왕의 당나라를 섬기는 정성은 하늘과 사람이 다 감복할 정도였다.

그는 당의 조정이 채 모양새를 갖추기 이전부터 방물과 조공사를 잇달아 장안으로 보내어

당고조 이연의 환심을 사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걸핏하면 따로 사신을 파견해

조명과 가르침을 구하곤 했다.

건무왕의 이같은 태도는 그때까지 내란을 완전히 평정하지 못해 골머리를 썩이던 이연의 처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연은 중국인들이 모두 두렵게 여기는 고구려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이를 국내 정사에 적극 활용해 민심을 얻겠다는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임오년(622년)에 건무왕이 조공사를 파견하자 이연은 수나라 말엽에 많은 중국인들이

고구려에 패망하여 포로가 된 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보냈다.

짐은 공손히 천명을 받아들여 천하에 군림하고, 천·지·인(天·地·人)의 삼령(三靈)에 삼가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니, 천하 백성들이 한결같이 짐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모두 태평함과 안락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왕은 대대로 요동을 다스리며 번국(藩國)으로 살아왔고,

중국의 정삭(正朔:황제가 제후에게 나눠주던 달력)을 받들고 조공을 이행하느라

해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그 정성을 다하였으니,

짐은 늘 이를 가상한 마음으로 대해왔을 따름입니다.

지금은 천하가 태평하고 사해가 무사하여 방물이 내왕하되 길의 막힘이 없으니

서로 친목하여 각자가 맡은 강역을 지키고 수호한다면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수나라 말년에 군사를 함부로 잇달아 일으켜 환난을 만들었거니와,

그로 하여 골육이 헤어지고 부부가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니

그 원한을 풀 길이 없습니다.

이제 두 나라는 다시 화친하여 의리와 정리를 나누게 되었으므로 짐은 이곳의 고구려인을

전부 조사하여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왕이 석방하여

보내주기를 제안합니다.

그것이 백성들을 편안히 기르고 서로 화해하며 용서하는 너그러운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 내부의 민심을 얻고자 하는 수작이었으나 건무왕은 이연의 조서를 받자

즉시 고구려에 포로로 붙잡혀 있던 중국인들을 방면하였는데, 그 숫자가 무릇 수만 명에 달했다.

당고조 이연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뒤로도 건무왕은 해를 거르지 않고 방물을 바치고, 달력을 나눠줄 것을 청하고,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수시로 사신을 보내니 마침내 갑신년(624년)에 이르러 이연은

형부상서를 책봉사로 파견해 건무왕을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국왕(上柱國 遼東郡公 高句麗國王)에

봉하였다.

이연이 삼국에 책봉사를 보낸 것은 모두 비슷한 시기의 일이었지만 백제왕은 대방군공(帶方郡公),

신라는 주국(柱國)이라 칭한 데 비해 유독 건무왕만은 그보다 한 급이 높은 상주국(上柱國)의 왕으로

삼은 것은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양국 관계가 그만큼 각별하고 돈독하다는 증거인 셈이었다.

이같이 꾸준한 북화(北和) 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 외교적인 우위를 확보했다고 믿게 된 건무왕은

백제와 신라가 당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막고 차차 기회를 보아 남쪽 두 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우선 대규모 선단을 만들고 수군(水軍)을 훈련시켜 서남방 해역에 집중 배치했다.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서해 뱃길을 차단하자 백제와 신라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을유와 병술 연간에 양국에서는 목숨을 건 항해를 감행하여 당나라 조정에 사신을 보내고

고구려 수군들이 해역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조공사를 보낼 수 없다며 하소연했다.

이에 이연은 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란 자를 지절사로 삼아 삼국을 차례대로 돌며 고구려와

서로 화친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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