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26
그런데 호사다마였을까,
대궐로 돌아온 장왕은 뜻밖에도 가슴이 무너지는 비보를 접했다.
자신의 이복 아우인 부여헌이 그만 마흔 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왕은 궐문 앞에 마중 나온 내관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자
어가에서 내려 슬피 통곡하며 부여헌의 사저를 찾아갔다.
상복을 입은 채로 왕을 맞이한 사람은 헌의 장자 복신(福信)이었다.
“아아, 어찌하여 창졸간 이리 되었더란 말이냐!”
왕은 끓어오르는 비통함을 가누지 못하고 어린 조카 복신의 어깨를 부여안았다.
헌이 궐에 나오지 못한 것은 갑신년에 책봉사를 따라 당나라를 다녀온 뒤였다.
헌의 몸이 허약한 줄을 알던 왕은 그가 심신을 돌보지 않고 사직과 왕업을 위해
천하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을 늘 걱정하여 되도록 무리한 일은 맡기지 않으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헌이 말하기를,
“아직은 쉴 때가 아닙니다.
형님께서 백제의 화려한 시절을 되찾기 전에 어찌 신이 편하기를 바라오리까.
신은 타고나기를 남들보다 약골로 타고났을 뿐 특별히 신병이 있는 것은 아니오니
형님께선 과히 염려하지 마소서.”
하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헌의 화술과 언변이 워낙 탁월한지라 그를 대신할 사람이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난국 곡경에 처하여도 그가 나서서 안 되는 일이 없었고,
그가 하자는 대로 하여 풀지 못하는 문제가 없었다.
스스로 보위를 다툴 정실의 자식이었으나 초개같이 자신을 버리고 허국과 견마지로를 다하니
백제 사람치고 헌을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시초에 장왕의 등극을 탐탁찮게 여겼던 일부 중신과 귀족들은 왕을 섬기는 헌의 태도를 보고
마음을 고쳤으며,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부여씨들의 뜻을 수렴하여 왕업의 기초와 토대를 마련한 것도
헌의 공적이었다.
외교에서도 그는 탁월한 수완과 비범한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수나라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당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중요한 일이 생기면 왕은 으레 부여헌을
사신으로 보냈다.
수나라에서는 그를 가리켜 대방군의 귀인이란 칭호를 썼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제후나 대신들이 타는
가마를 내어 맞이했는데, 이 같은 대우를 받는 사람으로는 번국의 조공사 가운데 오로지 헌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부여헌이 세상을 뜨자 장왕의 슬픔과 놀라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조카 복신을 끌어안고 목을 놓아 통곡하던 왕은 갑자기 코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따라온 신하들이 황급히 왕을 부축하여 어가에 태우려 하자
왕은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어서 내 아우에게 나를 인도하라. 내 필히 헌을 보리라.
보지 않고 어찌 보배 같은 아우를 떠나보낼 수 있으랴……”
그러나 왕은 이미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개보를 비롯한 중신들이 공론 끝에 왕을 대궐로 모셔가자 어의가 화급을 다투어 입궐하였다.
왕을 진찰한 어의는 잠시 기력이 쇠약해진 허번(虛煩)이라
진단하고 시급히 조치를 취한 뒤 약첩을 썼다.
왕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그날 초경 무렵이었다.
“서둘러 어가를 대령하라!”
왕은 눈을 뜨자 고함을 질렀다.
왕비와 왕자들은 물론 그때까지 궐에 남아 있던 군신들까지 나서서 다투어 만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왕은 비틀거리며 어가에 올라 부여헌의 사저로 갔다.
그리고는 아우의 시신이 누운 방으로 들어가 망자의 육신을 붙들고 구슬피 울었다.
“이제 천하의 때를 얻어 남역 평정의 위업을 볼 날이 목전에 이르렀거늘,
네 어찌 창졸간 싸늘한 몸으로 변하여 눈과 입을 닫고 누웠더란 말이냐!
헌아, 일어나라,
네가 이처럼 누웠으면 나는 과연 뉘와 더불어 지친의 우애를 나눌 것이며,
뉘와 마주앉아 백제의 화려한 영화와 왕업의 흥성을 논할 것인가!
오오 어찌할거나, 너를 여의다니! 헌아, 대체 이 노릇을 어찌할거나……”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왕의 애달픈 통곡에 어가를 따라와 시립한 문무 백관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왕은 밤새 아우의 시신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울음을 그치지 않다가 새벽녘에 다시 기운을 잃고
혼절하여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
부여헌의 장례는 왕자를 모시는 예에 따라 거룩하고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장왕은 아우의 초상을 치르는 내내 침식을 멀리하면서 친히 관과 수의(壽衣)를 내리고
장례에 쓸 재물과 사람을 보내어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아울러 유사에게 명하여 좌평 벼슬을 추증하고 그 시신은 역대 제왕들의 무덤이 있는
왕경 북산으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2 (0) | 2014.09.15 |
---|---|
제19장 천년대업(千年大業) 1 (0) | 2014.09.14 |
제18장 남역(南域)평정 25 (0) | 2014.09.14 |
제18장 남역(南域)평정 24 (0) | 2014.09.14 |
제18장 남역(南域)평정 23 (0) | 2014.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