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22
주자사가 이연의 명을 받아 장안을 출발한 때가 병술년(626년) 봄이었는데,
그가 떠난 직후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대변이 일어났다.
본래 이연은 당나라의 천자로 즉위하면서 큰아들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삼고 둘째아들 세민은
진왕(秦王)으로 봉했다.
그런데 당나라 건국의 주역이자 일등 공신이 진왕 세민임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뒤 세민은 수나라 장수 왕세충과 두건덕의 반란을 평정하고 당나라 건국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복종시켜 나날이 천하의 신망을 얻게 되었지만 태자 건성은 이렇다 할 공적이 없었다.
건성이 자신보다 뛰어난 아우를 질투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모든 공이 세민에게 돌아가고 세민을 추종하는 세력이 점점 불어나 마침내 자신이 천자의 지위를
계승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아우 원길(元吉)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과 작당해 세민을 제거하기로 공모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알아차린 세민은 자신의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울지경덕(蔚遲敬德) 등의
맹장들을 거느리고 한발 앞서 건성, 원길과 그 일패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병술년 6월의 일이다.
하지만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연은 형과 아우를 살해한 둘째아들 세민을 어쩔 수 없이 황태자로 삼았으나
그 성성하고 맹렬한 기세와 위용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은 그해 8월,
천자의 자리를 세민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니
이때 세민의 나이 불과 27세요,
그가 바로 훗날 중국 역사의 전설적 태평성세인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를 열게 될
태종문무 대성황제(太宗文武 大聖皇帝), 즉 당태종(唐太宗)이다.
장안의 이같은 정변을 알 길 없던 주자사는 먼저 고구려를 방문해 백제, 신라와 화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연이 그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던 고구려의 건무왕으로서는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의 각별한 우호 관계로 미루어 적어도 묵인은 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그는 지절사까지 파견한
당나라 조정의 처사에 왈칵 야속한 마음이 앞섰지만 이유야 어쨌든 조공 사절의 뱃길을 가로막았으니
면목 없는 일이기는 하였다.
이에 건무왕은 이연에게 표문을 올려 사죄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당나라가 중간에서 삼국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고구려를 떠난 주자사는 신라의 금성과 백제의 사비 도성을 차례로 순방하여 이연과 건무왕의 뜻을
함께 전한 뒤 백제에서 배를 내어 귀국길에 올랐다.
주자사가 떠나고 나자 백제의 장왕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이제 고구려에 대한 근심은 덜었다.
고구려왕 건무는 성품이 야비하고 비굴하므로 당주(唐主)의 눈 밖에 나는 짓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야말로 중단한 남역 평정의 대업을 다시 도모할 때가 아니냐?”
왕의 말에 내신좌평 개보가 동조하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대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것처럼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 법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당나라 지절사가 삼국을 두루 순방한 직후요,
절기도 7월 하순이라 백성들은 수확을 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군사를 내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므로 지금과 같은 호기가 다시없을 줄 압니다.”
그러자 장왕이 말했다.
“저쪽이 수확할 때라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적을 쳐서 영토를 넓히는 일도 중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들판에 익은 곡식을 두고
군역을 동원할 수 있겠느냐?
개보는 선납사에 명하여 앞으로 열흘간 백성들이 수확을 모두 마치도록 하고 5부의 장리들과
녹봉을 받는 나라의 신하들이 모두 들판에 나가 팔을 걷어붙이고 논일을 솔선토록 하라.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군사를 낼 것이다.”
백제의 군신과 백성들은 농사를 먼저 걱정하는 왕의 뜻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왕이 말한 열흘보다도 일정을 훨씬 앞당겨 수확을 마치고 서둘러 병영으로 모여들었고,
심지어는 번이 아닌 사람들조차도 군역을 자청하기에 이르렀다.
병술년 8월 초순,
장왕은 대궐 탑전에서 백관들을 모아놓고 마침내 우렁찬 목소리로 출정을 선포하였다.
“지난번에 우리가 지리산을 얻어 남역의 요지 한 곳을 장악하였으니
이번에 다시 그곳을 공격한다면 적의 반발이 거세어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무릇 전쟁의 승패는 허실을 탐지하는 데 있고 군사의 용병은 은밀하고도 오묘한 데 있는 법이니
이번에는 동북방의 낭성(娘城:청주 북방)을 집중 공략하는 것이 길하다.
낭성은 본시 우리의 낭자곡성(娘子谷城)을 흉악한 삼맥종(진흥왕)과 이사부가 빼앗아 가궁을 짓고
머물던 곳으로, 우리 백성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땅이다.
낭성을 취하면 이미 얻은 모산성과 더불어 속리악 서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요,
광물이 태산처럼 쌓인 국원과 상주를 공략할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며,
어리석은 적들은 이로 하여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니 이거야말로 어찌 일거다득이 아니겠느냐?”
장왕이 말한 낭성은 신라 진흥왕이 하림궁이란 가궁을 짓고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머물렀던
장소로 신라에서는 그 이후 왕재성(王在城)이라 일컬었는데, 그 위치는 늑노현 서북방에 있었다.
용병과 병법에 능하고 누구보다 지리에 익숙한 왕은 이번에도 친히 장수들에게 군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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