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25
왕의 벼락같은 고함소리에 중신들은 하나같이 자라목을 하였다.
시립한 호위병들이 재빨리 흥수에게 달려들어 양팔을 붙잡고 끌어내려 하자
내신좌평 개보가 황망히 왕의 발 아래 부복하여 아뢰었다.
“흥수의 죄 죽어 마땅하오나 오늘은 나날이 번성하는 대왕 폐하의 왕업을 감축하는 날이올습니다.
이같이 좋은 날에 피를 보아 좋을 것이 없으니 부디 치죄를 훗날로 미루옵소서.
귀경하여 중벌로 다스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신하들 중에 또 한 사람이 일어났다.
다름 아닌 명장 백기였다.
“흥수는 본래 술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자입니다.
그런 그가 대왕 폐하의 위업에 감격한 나머지 지나치게 과음하여 주제넘은 주사를 부린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해량합시오.
죽이기에는 실로 아까운 인재올시다.”
개보에 이어 백기까지 흥수를 두둔하고 나오자
왕은 마지못한 듯 명을 거두었다.
하지만 더 이상 여흥을 즐길 마음이 사라졌는지,
“저 자를 옥거에 태워 도성으로 압송하라.
내 환궁하여 친히 문초하리라.”
하는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자리를 뜨고 말았다.
이튿날 술이 깨고 나자 왕은 간밤의 일을 떠올리고 좌평 개보를 불렀다.
“어젯밤에 술판을 깬 흥수라는 자가 누구냐?”
왕의 물음에 개보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입을 열었다.
“흥수는 곰나루 사람으로 그 가계가 대대로 벼슬을 지낸 명문의 자손입니다.
하오나 일찍이 성대왕께서 사비로 천도할 때 흥수의 증조가 이에 반대하여 따라오지 아니하였고,
흥수의 조부는 계룡산에서 도를 구하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일평생 학문과 경전을 가르쳤는데,
수해 전에 천수를 다한 좌평 왕효린이나 왕변나도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우고 깨우친 사람들입니다.
신도 어려서는 흥수의 조부를 찾아다니며 글을 배운 일이 있어 전에부터 알던 처집니다.
불경한 소리를 지껄인 흥수를 높여 말하기가 송구하오나 그는 뜻이 곧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며,
워낙이 식견이 비상하고 재주가 무궁무진하여 신도 그 깊이를 다 알지 못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철모르고 저지른 일이니 모쪼록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이 잘 타이르겠나이다.”
그러나 왕은 고개만 가볍게 끄덕일 뿐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개보가 잠시 무춤거리다가,
“이런 말씀은 드리기가 뭣하오나 흥수와 관련하여 믿을 수도 없고 안 믿기도 어려운
재미난 일화가 있습니다.”
하였다.
장왕이 호기심을 보이자 개보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흥수의 조부가 백수를 누렸고, 또 죽을 때에도 오색의 영롱한 무지개가 숨 떨어지기 직전부터
장례를 다 마치도록 계룡산을 감싸는 등 여러 영험한 징후들이 많았던 터라
아직도 곰나루에서는 말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온데,
그가 임종하는 자리에서 평소 행실이 바른 셋째 아들 내외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갔다가 내년에 다시 오마 하고서 붓을 들어 날짜를 적고 자신의 손에도
먹점 하나를 찍었다고 합니다.
한데 종효를 하고 얼마 아니 있어 쉰을 넘긴 그 셋째 며느리의 몸에 태기가 돌아
이듬해 아들을 낳았더랍니다.
산일에 이르자 다시금 하늘에서 오색의 무지개가 내려와 온 집을 감쌌는데,
그날은 전에 시부가 일러주고 간 날짜와 단 하루도 다르지 아니한 데다,
더욱 해괴한 일은 출생한 아이의 손바닥을 펴보니
거무스름한 먹점의 흔적이 너무도 뚜렷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낳은 아이가 과연 생이지지(生而知之)한 데가 있어 가르치지 않아도 글을 알고,
배우지 않아도 사리를 분별하며, 처음 보는 집안 식구들도 그가 누구며 어떤 사람인가를
환히 알아 맞추었다고 합니다.
흥수의 왼편 손바닥에는 지금도 검은 점이 마치 먹물처럼 배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면 그가 조부의 환생이란 말인가?”
“글쎄올시다. 하오나 흥수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개보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한 번 왕의 자비와 용서를 간청하였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왕이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본래 술판이 끝나면 잊는 법이다.
어제 이미 용서하여 살려두었는데 어찌 다시 지나간 일을 재론하겠는가.
더구나 과인이 화를 낸 것은 그의 말이 제법 이치에 닿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왕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고로 왕의 면전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신하는 그 예가 흔치 않다.
흥수에게는 낭성을 맡아 다스리게 하고 따로 1천의 군사와 병권을 주라.
그가 만일 입만 산 가납사니가 아니라면 뒤에 기뻐할 일이 생길 것이다.”
이리하여 왕은 새로 얻은 낭성 방비를 흥수에게 맡기고 나머지 장수와 신하들을 이끌고 환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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