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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남역(南域)평정 18

오늘의 쉼터 2014. 9. 13. 21:22

제18장 남역(南域)평정 18 

 

 

 

“을제공은 덕이 높고 지략이 뛰어난 양신 중의 양신이요 가까운 왕실 족친으로,

사직과 왕업을 걱정하는 마음이 누구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를 조정에 불러들인다면 이번에 당한 것과 같은 참변은 두 번 다시 겪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들어보니 숙흘종의 아들인 을제야 빈틈없는 왕실의 사람이며 사사롭게는 자신의 당숙뻘인지라

모를 턱이 없었지만 오래전에 들은 말이 있어 사뭇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전에 백반은 을제가 신통치 못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너는 같은 사람을 그토록 높여 말하니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구나. 그는 병부령 칠숙과 비교하여 어떤 인물이냐?”

왕이 미심쩍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용춘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칠숙이 비록 지모는 있으나 을제공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작년에 부여장이 늑노현을 침공한 뒤로 거타주와 하주의 군사들을 북방으로 빼돌린 이가

다름 아닌 칠숙이 아닙니까?

만일 양주의 군사들을 그대로 두었더라도 남악을 송두리째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용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명도 거들었다.

“지금 조정에서 벼슬에 다니는 사람 가운데 열에 예닐곱은 숙부에게 잘 보여 출세한 숙부의

신하들입니다.

예로부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인데 숙부를 임금처럼 따르는 자들이 어찌 참된

충신일 수 있나요?

천하를 움직일 기재들이 출세를 마다하고 은둔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오니 비록 하루아침에 조정의 백관들을 모조리 갈아 치울 수는 없겠지만 아바마마께선

이제부터라도 사람을 가려 쓰셔야 합니다.

백제에게 거타주의 절반을 잃은 지금이야말로 식록만 축내는 숙부의 신하들을 내어 쫓고

조정의 면모를 일신할 다시없는 호기가 아닙니까?

오로지 아바마마의 성지(聖旨)만을 받들고 섬길 충신들로 조정에 새바람을 불어넣지 않는다면

우리 식구의 장래는 고사하고 나라와 왕실의 운명 또한 아침 해에 마를 이슬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천명의 직언을 듣자 왕과 왕비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용춘이 말을 보탰다.

“나라의 성쇠는 대개 인물의 기용에 달려 있는 법입니다.

작년에 늑노현을 습격하고 이번에 우리의 기잠성을 빼앗은 백제 장수 중에는

이가 검은 흑치라는 자가 있는데, 그는 부여장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부남의 흑치국에까지 사람을 보내 데려온 자라 합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계림의 산곡간에 묻혀 있는 보배 같은 인걸을 찾아내어

그에 걸맞는 중책을 맡기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적의 침략을 당해서도 나가서 싸울 장수가 있고,

이를 부릴 군사(軍師)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누가 뭐래도 널리 인재를 구할 땝니다.”

“하면 을제를 명초(命招)하여 어떤 직책을 맡기는 것이 좋을꼬?”

“우선은 승부령의 자리 하나가 비었으니 마정(馬政)의 일을 보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적당히 기회를 보아 벼슬을 높이고 중책을 맡기심이 좋을 것입니다.”

용춘은 성골인 을제를 끌어들였을 때 혹시 있을지도 모를 백반과 중신들의

반발을 우려해 그렇게 말했다.

“알았다. 날이 밝거든 거로현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마.”

그런데 왕명을 받고 거로 삼현으로 을제를 데리러 갔던 이가 그만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이유인즉 을제가 중병이 들어 기동이 어려우므로 왕명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거였다.

용춘은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거로현을 다녀온 사람을 불렀다.

“을제공께서 병환이 위중하다니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의원들이 다투어 관아를 드나들고 식구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으며

집안에는 약 달이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편찮다던가?”

“이름 모를 괴질을 얻었다 하더이다.”

“직접 신후를 여쭈었던가?”

“웬걸입쇼. 비접을 나가 계시는 바람에 뵙지 못하였습니다.”

몇 마디를 나눠본 용춘은 마음에 더욱 의심을 품었다.

이튿날 그는 왕의 허락을 얻어 친히 거로현으로 향했다.

금성을 떠난 지 꼬박 사흘 만에 고자군 남단에서 배를 타고 섬에 이르러 태수 관저를 찾아가니

용춘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대문 앞에까지 마중을 나온 사람은 놀랍게도 을제 당자였다.

“이게 누구신가, 조카가 아닌가!”

중병에 운신기동(運身起動)도 못한다던 을제가 건강한 모습으로 용춘을 반갑게 맞았다.

“실로 오랜만에 존안을 뵙습니다. 종숙(從叔)께서는 그간 평강하셨는지요?”

용춘이 땅에 엎드려 집안 어른을 뵙는 예로 큰절을 하자

을제가 황망히 용춘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절은 무슨 절, 조카가 못난 아재비를 만나러 먼길을 온 것만도 고맙기 한량없지.

어여 안으로 드시게나. 봄이라곤 하나 갯바람이 아직 차갑네.”

비록 숙질간이라곤 해도 을제는 용춘보다 고작 두 살이 위였다.

두 사람이 내당에 무릎을 맞대고 앉자 을제가 문득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다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 송장을 치러 왔는가?”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어찌된 영문입니까?”

“조명을 받지 않으려니 꾀병을 앓는 수밖에.

자네가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벌여 일을 번거롭게 만들어놓았네.

나는 예서 살다가 예서 죽을 작정이야.

자네도 눈으로 봐서 아실 테지만 이토록 평화롭고 넉넉한 곳을 버리고 무엇을 하러 뭍에는 나가?

나는 섬에서 지내는 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네.”

그때 방문이 열리고 관아의 별배들이 넷씩이나 달라붙어 주안상을 들이는데,

용춘이 상 위를 훑어보니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찬이 걸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산해진미가 그득하였다.

장소가 갯가니만치 해초와 물고기 요리도 수십 가지에 달하지만 육고기며 약초 나물도

그에 못지 않아서 상 한쪽 모서리에 구색을 갖추려고 차려놓은 백반곽탕이 오히려 초라할 정도였다.

집집마다 궁기가 도는 육지의 봄 형편을 감안한다면 과연 별천지에 온 듯싶었고,

임금이 받는 수라에도 댈 바가 아니었다.

고자군에서 배를 내어올 때 을제를 일컬어 남해제왕이라 칭송하던 섬사람들 말이 과연 빈말이 아니구나 하고 용춘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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