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17
한바탕 전란을 겪고 난 이듬해(625년),
용춘은 대신들이 퇴청하기를 기다렸다가 아내인 천명 공주와 나란히 대궐을 찾았다.
그는 백제와 전란 중에 극심한 복통을 앓아 정사에 참례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간신히 병이 나아 다시 공무를 본 지 불과 사나흘 만이었다.
“백제왕 부여장은 마음이 음흉하고 성품이 교활한 자로 지략과 계교가 만만치 아니한
극히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는 선화와 성혼한 것을 내세워 스스로 국서라 칭하며 몸을 낮추다가도
우리에게 허점이 보이면 가차 없이 대군을 내어 백성과 땅을 함부로 유린하니
만일 전하께서 이러한 자를 털끝만큼이라도 사위로 여기신다면 신라의 사직은
앞날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비와 더불어 일찍 침전에 들었다가 그곳에서 딸 내외를 맞이한 왕은 한 차례 늙은 왕비의
얼굴을 돌아본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짐은 이미 오래전에 선화를 잊었다.
선화를 잊었는데 어찌 부여장을 사위로 여기겠느냐?
나의 사위는 오직 그대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눌최가 죽고 지리산을 잃은 뒤로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던 백정왕이었다.
성품이 너그러운 왕도 이때만큼은 장왕에 대해 말할 수 없이 노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짐은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부여장이란 작자를 알 수가 없구나.
제아무리 개 이빨처럼 지경을 접하고 있지만 사람에게는 본래 신의와 떳떳한 도리를 지켜나가려는
병이지성(秉훙之性)이란 게 있는 법이다.
화친을 운운하며 대찰을 짓겠다기에 백공까지 보내 도운 일이 바로 엊그제와 같은데,
돌아오는 보답이 번번이 이런 꼴이니 너무도 괘씸해 도무지 부아를 가라앉힐 수가 없구나.
내 저희를 해친 일이 없거늘 어찌 해마다 이럴 수가 있더란 말인가!”
왕은 새삼 격분해 옥음을 높였다.
“아뢰기 송구하오나 부여장만을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현자는 개미 떼와 개구리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큰물이 질 것을 알고,
봄에 논물 도는 것을 보고 가을 풍흉을 미리 점친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하주 6성과 남악을 잃은 것은 방비를 게을리 한 중신들의 탓이 더 큽니다.
일전에 모산성을 잃었을 때 백제의 속셈을 미리 간파하고 서둘러 대비를 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참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요,
마찬가지로 지금 사태의 위중함을 알고 시급히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용춘은 평소 신하들 앞에서 말하지 못한 심중의 얘기들을 격앙된 어조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하께서도 익히 아시는 일이지만 부여장은 타고난 성품이 간악하고 술수에 능한 인물로
보위에 오르자마자 우리를 향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그가 보위에 오른 직후 백제에서는 외지를 떠돌던 왕실 족친들을 모조리
사비로 불러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군사들을 밤낮없이 훈련시켰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를 공격하여 망하게 하려는 수작입니다.
부여장은 능히 그럴 만큼 야심이 있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그는 한때 마장수로 변장해 우리나라에 살면서 경향 각처를 샅샅이 염탐한 적이 있어
지형지세와 내부 사정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부여장이 쥐새끼처럼 금성에 숨어든 뒤 음란한 노래를 짓고 퍼뜨려
선화를 빼내어간 것도 어쩌면 자신의 야심을 펴기 위해 미리부터 계산된 술수였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계림을 쳐서 병탄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20년 동안이나 치밀한 준비를 해온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부여장이 잘되기만을 바라고 있었으니
실로 억장이 무너져 말이 나오지 않는구려.”
마야 왕비가 백정왕을 향해 크게 한숨을 토했다.
용춘이 다시 끊어진 말허리를 이었다.
“이리 떼는 곰과 같은 큰 짐승을 상대할 적에 처음부터 사력을 다해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면 그때는 무리 전체가 필사의 각오로 덤벼드는 법이옵니다.
이번에 하주 6성을 침략한 백제군의 숫자가 무릇 1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부여장은 20년 이상 준비한 일을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싸움은 장차 있을 백고천난의 시발이요,
불원간 양국이 사생결단으로 치러야 할 대전의 전초전에 불과합니다.
백제는 이제 전날의 백제가 아닙니다.
부여장의 백제는 호랑지국으로 변했습니다.
마땅히 이에 대한 대비가 시급한 줄 압니다.”
“그래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성을 보축하고 군사를 징발하는 일도 중하오나 그보다 더 바쁜 일이 꼭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고?”
“백제는 작년에 우리 늑노현을 공격하여 관심을 그쪽으로 돌려놓고 금년에는 남악으로 대군을 내는
교활한 책략을 썼습니다.
그런데 딱하게도 부여장의 그와 같은 계책을 꿰뚫어본 이가 본조에서는 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부여장과 맞설 만한 지략을 가진 이가 지금의 조정 대신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낭패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신라에는 그토록 인물이 없다는 말인가?”
“조정에 인물이 없는 것은 사실이오나 나라에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계림은 예로부터 동해로 솟아오른 불덩이가 처음으로 그 뜨겁고 신성한 빛을 비추는 곳이라
지기가 영험하고 인걸과 기재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찌 일락서산의 백제땅이나 북방 험지의 고구려에 비하오리이까.
다만 유능한 인재들은 대부분 골품에 묶이거나 초야에 은둔하고 있을 따름이며,
더러는 변방의 한직을 떠돌면서 아까운 재주와 기량을 썩이고 있을 뿐입니다.”
“혹 심중에 특별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던가?”
“당장 찾아서 쓸 사람은 거로(巨老) 삼현(三縣)을 맡아 다스리고 있는 을제(乙祭) 공이 있습니다.”
을제는 숙흘종의 3남 가운데 막내아들이요,
서현에게 시집간 만명의 오빠였다.
그는 숙흘종이 죽은 뒤 위로 두 형이 백반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이 된 것과는 달리
스스로 변방의 미관말직을 자청하여 손바닥만한 고을을 옮겨가며 다스렸는데,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칭송이 자자하니 백반이 해중의 섬인 거로, 송변(松邊), 매진이
(買珍伊:장승포와 거제도)의 3현을 맡겨 실상 귀양살이를 시켜버렸다.
그런데 을제가 부임한 얼마 뒤부터 섬에 사는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뭍에 없는 태평지절과 별유천지가 그곳에 생겼다 하고,
을제를 일컬어 남해제왕(南海帝王)이라 칭할 뿐 아니라,
수십 년 전에 뭍으로 살러 갔던 섬사람과 그 자손들까지도 소문을 듣고는 되돌아와서
근자 10여 년 사이에 불어난 백성의 숫자가 갑절은 되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8장 남역(南域)평정 19 (0) | 2014.09.13 |
---|---|
제18장 남역(南域)평정 18 (0) | 2014.09.13 |
제18장 남역(南域)평정 16 (0) | 2014.09.11 |
제18장 남역(南域)평정 15 (0) | 2014.09.11 |
제18장 남역(南域)평정 14 (0) | 2014.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