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16
결사대를 지휘한 이는 물론 눌최였다.
그는 성벽의 높은 곳에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결사대의 진행을
절도봉으로 일러주었다.
그로 하여 신라군들은 수많은 백제군에 에워싸였어도 허를 치고는 자유자재로 빠져나가는 것이
흡사 돌 틈 사이에서 작은 물고기가 노는 듯하였다.
시초에는 멋모르고 당하기만 하던 백제 군사 가운데 눌최를 맨 처음 발견한 이는 봉잠성을 함락시킨
부여굴안이었다.
“바로 저 자다! 저 자를 잡아야 한다!”
그는 부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눌최를 향해 말을 달려갔다.
하지만 눌최의 옆에는 건장한 체구의 장정 하나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쉴새없이 활질을 하는데,
그 화살이 단 하나도 빗나가는 법이 없어 좀처럼 접근을 할 수 없었다.
성루에서 날아온 화살은 그야말로 백발백중이었다.
주위에 있던 부장 두세 명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자
굴안은 그만 안색이 허옇게 변했다.
“대체 저 명궁이 누구냐? 장수의 이름이나 알았으면 좋겠구나.”
그는 급히 말머리를 잡아채어 50여 보쯤 물러서서 실눈을 하고 성벽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면 사정권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해 안심하고 성루를 관찰하는 중인데,
별안간 매서운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온 화살 하나가 굴안의 왼쪽 어깻죽지를 정확히 관통하고 말았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악!”
굴안은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며 어깨를 감싸쥐고 말에서 떨어졌다.
부장들이 황망히 굴안을 들쳐업고 진영으로 돌아오니
마침 기현성을 함락시킨 연문진과 은상이 도착해 있다가,
“이게 대관절 어찌된 영문이오?”
하고 물었다.
굴안의 부장들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은상은 당장 벗어놓은 갑옷을 입고
방패와 무기를 찾아들었다.
“함부로 갔다가는 자네도 당할 걸세.”
자리에 누운 굴안이 성한 팔을 휘저으며 은상을 만류했다.
“나는 아직 그와 같은 명궁을 본 적이 없네.
그들을 잡자면 성벽 뒤로 몰래 군사를 내어 양쪽에서 협공을 해야 하네.
살 하나에 반드시 사람 하나가 없어진다고 보면 틀림없으이.”
그러자 연문진이 말했다.
“은상은 앞으로 가서 그들의 시선을 붙잡아두라.
나는 따로 군사를 이끌고 성벽 뒤로 돌아갈 것이다.”
이리하여 은상이 눌최와 벌구의 전면에서 그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문진은
칼과 도끼로 중무장한 한패의 군사를 이끌고 가만히 성벽 뒤쪽으로 숨어들었다.
눌최는 결사대를 지휘하느라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벌구는 벌구대로 방패를 든 은상의 무리를 상대하느라 온통 정신이 앞으로만 팔려 있었다.
그 틈에 성벽 뒤쪽을 무사히 기어올라간 문진의 부장 하나가 눌최를 향해 벼락같이 달려들며
도끼를 휘둘렀다.
이에 눌최는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머리를 잃고 불귀의 객이 되었는데,
목이 떨어진 후에도 한동안은 손에서 지휘봉을 놓지 않고 군사들의 진퇴를 빈틈없이 지휘하였다.
“네 이놈!”
상전 눌최가 죽자 벌구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대갈일성 소리를 치며 달려들어 적장에게서
도끼를 빼앗으려 했다.
놀란 적장은 사력을 다해 엉버텼지만 이미 이성을 잃고 격노한 벌구의 기운을 당할 수는 없었다.
눌최의 목을 친 도끼는 이내 벌구의 손으로 넘어갔고,
눌최를 죽인 장수도 곧 그 도끼에 찍혀 처참한 꼴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덤벼라! 내 어찌 너희를 용납할 것인가!”
상전의 원한을 갚은 벌구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아귀처럼 날뛰며 도끼를 마구 휘둘러댔다.
그러나 활이 아닌 도끼를 든 벌구는 그다지 무서운 존재가 되지 못했다.
한두 번 헛손질을 하여 중심을 잃은 사이에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칼로 찌르고 도끼로
내리쳐 쓰러뜨리니 순식간에 사지가 갈가리 찢겨 참혹한 몰골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눌최와 그의 충복이었던 종명궁 벌구의 최후가 이러했다.
눌최의 마지막도 해론에 못지 않게 장렬한 것이었지만 하찮은 종의 신분으로 생사를 넘어 끝까지
주인을 섬긴 벌구의 충절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후에 눌최의 죽음을 전해들은 백정왕은 구슬피 통곡하며 그에게 살아서는 오르지 못할 급찬 벼슬을
추증하였다.
갑신년 10월에 있었던 백제와 신라의 싸움은 또다시 백제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장왕 등극 이후 양국간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신라는 일방적인 열세를 면하지 못했는데,
이때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6성 구원에 실패한 신라의 5군은 대야성과 거열성을 잇는 6성을 시급히 보축한 뒤 새 성곽에 의지해
배수진을 쳤고, 위급함을 느낀 금성에서도 병부령 칠숙과 염종이 직접 나서서 도성 방비를 맡고 있던
장군과 당주들을 앞세우고 접전 지역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차출한 군사들로 원군의 규모를 배나 늘린 다음에야 간신히 백제군의 동진을
저지했으니 양국의 우열이 불과 반세기 만에 완전히 역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로써 신라는 속함군(함양)의 6성과 지리산 전역을 잃어 거타주의 영토가 절반이나 줄어들었고,
백제로서는 남역 평정의 꿈을 실현할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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