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15
사력을 다해 3성을 지키던 눌최의 군사들은 믿었던 원군들이 그대로 돌아가버리자
비분강개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다.
눌최 역시 처음에는 야속한 마음에 이를 갈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곰곰 생각하니
원군이 오더라도 이미 성을 지켜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망루에 올라 적군이 개미 떼처럼 에워싸고 있는 성곽 주변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가잠성에서 죽은 친구 해론의 얼굴을 떠올렸다.
해론의 최후가 그토록 장렬했는데 자신이라고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환청 같은 한가닥 노랫소리가 귓전을 맴돌기 시작했다.
양춘화기(陽春和氣)에는 초목이 다투어 꽃이 피나
엄동세한(嚴冬歲寒)이면 푸른 것은 오로지 송백(松柏)뿐이로세
그것은 해론의 장가를 지었던 이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 도비의 무덤 앞에 남긴 시문의 한 구절이었다.
눌최는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구야.”
예나 지금이나 그런 눌최의 곁에는 그림자처럼 주인을 섬기던 종명궁 벌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벌구 역시 목전에 닥친 운명을 모를 턱이 없었다.
“네, 도련님.”
“나의 수명과 운수가 예서 끝나는 모양이구나.”
벌구는 시립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누대에 걸쳐 나라의 작록과 왕의 성은을 입은 신하로 마땅히 죽음도 불사해야 할 형편이지만
너는 하찮은 종의 신분으로 목숨을 버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지금이라도 뒷문으로 달아나서 명 보전을 하거나 그게 어렵거든 차라리 항복하여 백제에 가서
살도록 해라.
백제에는 골품제가 없을 뿐더러 사람을 재주와 능력에 따라 가려 쓴다고 하니
너와 같은 재주만 있다면 벼슬도 얻고 능히 호강도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눌최는 벌구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그간 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쯤에서 그만 헤어지자꾸나.”
그러자 주먹만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섰던 종명궁 벌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이 소인을 나쁘게 말하였지만 듣지 않고 어디든 데리고 다니시며
여지껏 저를 거두어주셨습니다.
설혹 사람이 천년 만년 산다고 할지라도 소인은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남은 인생이 고작 몇십 년입니다.
어찌 작은 것을 얻고자 큰 것을 버리겠습니까?
소인은 도련님께서 장안으로 데려갈 적에 이미 저승까지 수행하기로 마음속에 깊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도련님께서 가시는 길이 곧 저의 갈 길이올시다.”
“지금 내가 가려는 곳은 그동안 너를 데리고 다닌 길과는 다르다.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생사의 강을 건너는 것인데 어찌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제 비록 하찮은 종놈이나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도련님을 따라다니며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만대를 흘러도 썩지 않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도련님께서 이미 그러한 뜻을 세우셨으니 소인이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부디 저를 끝까지 데려가 주십시오.”
벌구의 간곡한 말에 눌최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네 뜻이 정녕코 그렇더냐?”
하니 벌구가 굳게 다문 입술로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구의 의사를 확인한 눌최는 그 길로 낙담한 성안의 군사들을 모조리 한곳에 불러모으고
칼을 높이 뽑아 든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봄에는 초목이 모두 무성하나 추운 겨울이 되면 오로지 송백만이 푸르다 하였다!
지금 우리는 외로운 성에 홀로 남아 날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지조 있는 선비와 의로운 장부가 충절을 다해 이름을 드날릴 때가 아닌가!
나는 성을 에워싸고 있는 저 간악한 백제의 무리들에게 우리 신라인의 기상과 절개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천추만대에 썩지 않을 이름을 남기려 하거니와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할 것이냐?”
비장한 고함소리에 7백여 신라 군사들은 돌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군이 돌아간 뒤에 분함을 참지 못해 눈물만 흘리던 그들은 눌최의 의연한 모습을 보자
비로소 용기를 얻고 결전의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다.
“기왕 죽을 목숨이라면 어찌 앉아서만 당하겠소!”
“까짓 한번 죽기 살기로 붙어보는 거지! 한 놈이라도 더 죽인다면 그만큼 성공이 아니오!”
“성주께서 앞장을 서시오! 우리는 오직 명령에 따르겠소!”
여기저기서 울분과 결의에 찬 외침이 터져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성이 떠나갈 듯 와, 하고 함성이 일었다.
눌최는 이들로써 결사대를 조직해 성안의 곳곳에 배치하고 백제군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원군이 물러간 것을 확인한 백제 군사들은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진격 명령이 떨어지자 3성을 포위한 백제군 5만여 명이 일제히 성문으로 돌진해
성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선발대가 성루에 백제 깃발을 꽂고 난 뒤부터 문제가 생겼다.
별안간 성안의 곳곳에서 함성이 일며 적게는 십수 명, 많게는 수십 명씩 무리를 지은 군사들이
나타나 종횡무진 말을 달리며 닥치는 대로 백제군을 참살하기 시작했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백제군 선발대로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도리밖에 없었다.
선발대뿐 아니었다.
성루에 펄럭이는 자국의 깃발을 보고 태평스럽게 들어오던 후군들까지도 여지없이
창칼에 찔리고 목이 날아갔다.
“복병이다!”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 사방에 적의 결사대가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 말이 후군과 장수들의 귀에까지 이르는 사이에 무수한 백제군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3성의 백제 장수들은 황급히 전열을 가다듬고 북소리를 울리며 조심스럽게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신라군 결사대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수천 명의 무장한 군사를 뻔히 눈으로 보고도 수십 명에 불과한 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칼을 뽑아 달려드니 당최 기가 차고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신라의 장수와 군사들은 들으라!
너희는 어찌하여 구원병도 보내지 않는 나라를 위해 존귀한 목숨을 함부로 버리려 하는가?
만일 이제라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다면 좋은 집과 재물을 하사하여 백제의 백성으로
걱정 없이 살게 하리라!”
당황한 백제 장수들은 달콤한 말로 항복을 권유했지만 신라군 결사대의 극렬한 저항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이 예기치 못한 싸움은 거의 한식경이나 피를 튀기는 사투로 이어지고 나서야 겨우 수습이 되었는데,
그 바람에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백제군의 숫자가 물경 이삼 천을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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