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13
계미년(623년) 10월, 신라의 북변을 습격해 관심을 그곳으로 유도한 장왕은
그 후로 승려나 농부들을 가장한 첩자를 보내 신라가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면밀히 관찰했다.
과연 장왕의 예상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늑노현 침공이 있은 직후인 갑신년(624년) 정월,
신라 조정에서는 백제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몇 가지 조치를 서둘러 취하였다.
우선 왕을 호위하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명을 새로 임명하였고, 상사서(賞賜署)에도
대정 1인을 두어 상벌의 위계를 바로 세웠으며, 예부에 속한 대도서(大道署)에도 대정을 두어
조정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장춘의 뒤를 이어 아우인 백룡(白龍)을 후임자로 삼고, 사직을 간청한 노장 무은의 뜻을 받아들여
문무를 겸비한 병부대감 석품으로 하여금 일선주의 행정을 맡겼다.
병부에 대감 2인을 새로 둔 것은 용춘이 출사한 뒤인 계미년(623년) 정월의 일인데,
제감을 맡고 있던 사찬 석품이 아찬으로 승차해 대감직에 올랐다가 이때에 이르러 일선주 군주로
나가게 되었다.
신라에서는 백제의 관심이 오로지 당성군에 이르는 길목을 차단하는 데 있다고 판단해
거타주와 하주 일부의 군사들까지 빼내어 국원 일대의 경계를 튼튼히 하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백제의 장왕으로서는 내심 쾌재를 부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왕은 남역 평정에 뜻을 두면서부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당나라에 극진히 조공하는
예를 잊지 않았다.
이때 중국에서는 당나라 왕조가 반란군들을 차례로 토벌하여 내란을 거의 평정해가고 있었다.
갑신년 3월, 당황제 이연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정왕을 주국낙랑군공 신라왕
(柱國樂浪郡公 新羅王)으로 책봉하면서 백제에도 따로 사신을 보내고 장왕을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 百濟王)에 봉했다.
물론 한 쪽은 주국(柱國)의 왕이라 칭하고,
다른 쪽은 군왕(郡王)에 책봉하는 미미한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신라에서 한발 앞서 당에 조공사를 보내었고, 춘추가 수년째 장안에 유숙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제당(濟唐) 관계의 비약적인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장왕의 발빠르고 탁월한 외교 수완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었다.
책봉사가 다녀간 그해 7월,
장왕은 또다시 자신의 이복 아우인 부여헌을 당에 조공사로 파견했다.
이는 혹시 신라를 공격했을 때 있을지도 모를 당의 간섭을 미연에 차단하겠다는 치밀한 전략이었다.
이제 당나라에까지 신라와 대등한 관계를 구축했다고 판단한 장왕은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갑신년 10월,
그는 마침내 벼르고 별렀던 대군을 일으켜 신라에 대한 재침을 감행했다.
이번에 그가 노린 곳은 덕유산과 지리산 사이의 남방 접경이었으니
신라로서는 불시에 허를 찔린 셈이었다.
장왕은 내신좌평 개보를 군사(軍師)로 삼고 병관좌평 해수를 대장군으로 삼아 여섯 갈래로
신라의 거타주를 공격하였다.
달솔 백기는 선봉장이 되어 보기병 1만을 이끌고 속함성(速含城)을 공략하고,
흑치사차 역시 1만의 군사로 기잠성(岐岑城)을 쳤으며,
부여사걸(扶餘沙乞)도 1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앵잠성(櫻岑城)으로 향했다.
또한 굴안은 봉잠성(烽岑城)으로 나아가고, 연문진과 은상은 기현성(旗懸城)으로 진격하였으며,
부여망지도 1만 5천이나 되는 군사로 혈책성(穴柵城)을 쳤는데,
이때 동원된 6군의 숫자가 도합 10만이 넘었다.
거타주 접경의 6성(함양 일대)이 졸지에 엄청난 전란에 휩싸이자 당황한 신라 조정에서는
일선주와 하주의 군사를 비롯해 귀당, 법당, 서당의 5군에게 황급히 구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5군이 6성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패색이 짙어 손을 쓸 수 없는 형편이었다.
거타주 군주 임서(任舒)는 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속함성에서 백기의 칼에 전사했으며,
나머지 성곽 주변에도 적군이 개미 떼처럼 포위했는데,
그 형세가 너무도 굳세고 당당하여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일선주 군주 석품이 5천 구원군을 이끌고 속함에서 백기의 군사들과 사흘간이나
치열히 교전했지만 끝내 미치지 못해 퇴각하였고,
하주 군주 서현도 휘하의 정병 3천과 향군 1천을 모두 이끌고 혈책성을 구하러 갔다가 분패하자
신라군의 사기는 더 이상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곤두박질을 쳤다.
서현은 거타주 6성이 패하면 곧바로 하주가 위태로우므로 생사를 돌보지 않고 접전을 벌였지만
이미 휘하의 군사 중에 절반 이상을 국원으로 보낸 터라 애를 먹었는데,
혈책성 앞에서 부여망지를 상대로 1백여 합이나 싸우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그날 밤,
백제군의 야간 기습에 1천이 넘는 군사를 잃고 나자 그만 대야성(합천)으로 쫓겨오고 말았다.
결과는 신라의 대패였다.
거타주 6성 가운데 함락되지 않은 성은 하나도 없었다.
싸움에서 이긴 백제군의 위세는 가히 승천하는 용과 같았다.
참패한 신라군들로서 그나마 한 가지 위안거리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봉잠, 앵잠, 기현의 3성을
방어하던 눌최의 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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