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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남역(南域)평정 10

오늘의 쉼터 2014. 9. 11. 21:06

제18장 남역(南域)평정 10 

 

 

 

노여움으로 머리털까지 곤두선 무은은 곧 칼을 뽑아 들고 은상과 대적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전성기를 지난 늙은이요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하물며 상대는 보기 드물게 날렵하고 출중한 칼 솜씨를 지녀 삼사 합을 넘기는 데도

팔이 후들거리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채였다.

무은은 마침내 자신의 목전에 닥친 죽음을 예감했다.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생각하니 살 만치 살아 미련은 없었으나 귀산과 함께 모산성에서

죽지 못한 것이 새삼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백제의 버릇없는 어린아이는 당장 칼을 거두라!”

양측 군사들이 어울려 한창 엎치락뒤치락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던 살매현 입구에서 돌연

우렁찬 호통 소리와 함께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달려나오는 이가 있었다.

무은이 보니 나이는 서른이 채 안 된 청년이었는데,

도대체 누군지 알 수 없는 생면부지의 얼굴이었다.

“너는 누구냐?”

은상은 급할 것이 없다는 듯 그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네가 나의 이름을 알아 무엇하랴.

나는 본래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싸움에 나서지 않으려 하였는데

너희가 우리 스승님이 사시는 마을까지 넘보며 사람들을 마구 잡아죽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생면부지의 얼굴이 의연히 대꾸했다.

과연 그는 군사의 복장도 아니었으며, 허름한 갈옷에 칼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있어

신분조차 알 길이 없었다.

“보아하니 너는 하나뿐인 목숨이 무척 귀찮은 게로구나.”

은상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올린 채 비웃자 그 역시 파안대소로 응수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아우와 더불어 백제 옷을 입은 자는 장졸을 가리지 않고 무수히 목을 베었는데

대관절 그 숫자가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어찌 너라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자 웃고 있던 은상의 표정이 차츰 싸늘하게 변했다.

“그놈의 주둥아리를 언제까지 나불거릴 수 있는지 어디 보자!”

은상이 벼락같이 고함을 치며 칼자루를 고쳐 잡고 달려들자 갈옷의 청년 역시 익숙한 솜씨로

칼을 휘두르며 응전하였다.

본래 두 치쯤 짧은 검을 사용하는 은상의 칼 놀림은 보통 장수들보다 배반(倍半) 정도가 빨랐다.

명장으로 이름난 장춘이나 파랑이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 것도

바로 이 속검술(速劍術)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나타난 이름 없는 청년은 삼사 합을 겨루고 나자 대번 희미한 웃음을 짓고 말했다.

“속검이로구나. 그따위 하찮은 속임수로 누구를 해치겠다는 것이냐?”

말을 마치자 자신 역시 장검으로 칼을 재빨리 휘두르기 시작하는 데 은상의 칼 놀림보다

결코 느리지 않았다.

말과 말이 어울리고 칼과 칼이 불꽃을 튀며 허공에서 맞닥뜨린 지 50여 합,

승부는 좀처럼 갈리지 않고 주인에게 수시로 배를 걷어차인 말들만 지쳐 헉헉거렸다.

“제법이다. 신라에도 너와 같은 검객이 있었던가?”

잠시 말머리가 떨어져 틈이 생겼을 때 은상이 청년의 무예를 칭찬하자

청년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닥쳐라, 그런 말은 너 따위 애송이가 지껄일 소리가 아니다!”

청년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이 이내 말 배를 걷어차며 돌진했고 그로부터

다시 50여 합이나 어지러운 교전이 이어졌다.

실로 화려하고 현란한 싸움이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벌어지는 두 젊은이의 공방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무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신기로다. 저들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싸움에 승패가 없을 수 없었다.

1백 합 이상을 겨루고 나자 차츰 칼 놀림이 둔해지는 쪽은 오히려 은상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수세에 몰려 날아드는 칼끝을 막는 데만 급급하더니 이윽고,

“다음에 보자!”

하는 말을 남기고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멈추지 못하느냐!”

청년은 대갈일성 고함을 지르며 말을 짓쳐 은상을 쫓아가는 척하더니

무슨 생각에선지 뒤쫓는 것을 단념하고 말머리를 잡아채며 돌아섰다.

“살매현으로 돌아갑시다,

장군. 그곳에 백제군 잔당들이 아직 수십 명은 있을 게요.

어찌 한 놈인들 살려보낼 수 있겠소?”

청년이 무은에게 와서 그렇게 말했다.

넋을 잃고 섰던 무은도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젊은이는 뉘시오?”

“나는 이름을 밝힐 만큼 신통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저 초야에 묻혀 사는 일개 촌부일 뿐이지요.”

청년은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현을 구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나는 이만 갑니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인사조차 전할 겨를도 없이 부리나케 말을 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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