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3
“마침 잘 왔네.
내가 몸을 풀며 보니 과연 저것들은 허수아비와 같은 무리여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네.
내친 김에 자네와 내가 양쪽에서 협공해 외성을 치고 늑노현을 단숨에 빼앗아버리세.”
“좋소.
대왕께서는 적의 허실만 탐지하고 돌아오라고 했지만 어찌 군사를 내었는데
소득 없이 돌아갈 수 있겠소?
현을 뺏은 뒤에 적의 허실을 탐지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문진도 쾌히 동의했다.
흑치와 문진은 군사들을 두 패로 나누고 쏟아지는 시석을 헤치며 외성으로 돌진했다.
망루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현의 향군들은 두려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항차 늑노현의 외성은 말이 성이었지 현의 방비를 위해 쌓아둔 돌무더기에 불과하여
성곽도 허술하고 높이도 고작 예닐곱 자에 지나지 않았다.
겁을 집어먹은 향군들은 집어던지던 돌과 화살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눈치를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뿔뿔이 흩어져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향군을 인솔하던 몇몇 중당의 당주들이 고함을 질러 흩어지는 군사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백제군은 손쉽게 현의 외성을 수중에 넣었다.
외성을 얻고 나자 현을 취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이때 늑노현 현령은 차수(借守)라는 이름의 소사였는데,
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현을 버리고 당주들과 더불어 이웃 살매현(청주)으로 도망쳐서
몸을 의탁하였다.
늑노현의 위급함이 국원과 일선주에 전해진 것은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
국원의 방비를 맡고 있던 장춘은 즉시 날쌘 기병 1천여 기를 소집하여 늑노현으로 달려가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장춘의 처소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 한 사람이 식객으로 묵고 있었다.
그는 출정하려는 장춘의 옷소매를 황급히 붙잡고 만류했다.
“가지 마시오, 군주! 그저 못 본 척하고 예서 술이나 마십시다!”
손님의 말에 장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적군이 쳐들어왔는데 가지 말라니, 어째서 그러시는가?
평소의 축건백이답지 않네그려?”
“늑노현이야 본시 일선주의 속현이 아닙니까?
군주께서 아니 가셔도 일선주에서 군사를 낼 것입니다.”
“일선주는 일선주고 국원은 국원일세.
늑노현에 오른 봉화를 보고 소경의 군사를 내지 않는다면 우는 아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격일세.”
장춘이 뜻을 굽히지 않자 그 식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간밤에 천문을 보니 조짐이 좋지 않습니다.
패성(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가는 흰 꼬리를 끌며 사라지고 목성이 두 번씩이나 달을 삼켰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두 장수가 화를 당할 조짐입니다.
이번만큼은 제 말대로 보지 못한 척하십시오.
어차피 지금 가신다 해도 현은 벌써 적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자 장춘 역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내가 가야겠네. 가서 빼앗긴 성을 되찾아야지!”
“백제왕 부여장은 술수에 능하고 계책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장군이 소경을 비웠을 때 이쪽으로 군사를 낸다면 그땐 어찌하시렵니까?”
“소경 외곽의 방비는 이미 철통과 같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네.”
장춘이 한사코 뜻을 굽히지 아니하자 식객의 얼굴엔 점점 난감한 기색이 감돌았다.
“정 그러시면 주조(州助)나 부장들을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그들은 국원 요새에 빠짐없이 배치되어 한가로운 이가 아무도 없네.
항차 자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모르되 천문에 흉조까지 나타났다면 보낼 사람이 더 없어.”
이후로도 식객은 몇 차례나 더 장춘의 출정을 만류했지만 그는 끝내 무기와 방패를 갖추고 말에 올랐다.
“나를 걱정해주는 뜻은 고마우나 축건백이는 과히 염려하지 마시게.
천문과 지기는 본래가 변화무쌍한 법이거늘 외주의 국경을 지키는 장수가 그런 것을 다 따지면
어찌 나라를 온전히 지킬 수가 있겠는가?
신호로 봐서 침공한 백제군의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니 자네는 예서 잠깐만 기다리게나.
내 단숨에 적을 물리치고 돌아와 자네와 함께 술을 마실 테니.”
그는 마상에서 휘하의 주조와 조장(助將)들에게 소경의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라 이르고
1천 기병을 거느린 채 늑노현으로 달려갔다.
장춘이 떠나고 나자 축건백이라 불렸던 그 식객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했다.
“아, 또 한 사람의 충신이 화를 입겠구나! 그러나 어찌하랴,
나라는 충신을 지켜주지 못하되 충신은 목숨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 계림의 오랜 슬픔이 아니던가!”
그는 싸움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장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국원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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