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40)
백석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사비성을 떠나 신라에 인도 환생한 백부 춘남을 찾아 헤맨 지 어언 다섯 해,
그동안 각지를 누비며 자신과 엇비슷한 또래의 화랑이란 화랑들은 거의 다 만나보았지만
선뜻 이 사람이다, 싶은 자는 좀처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경향에 나도는 용화향도의 명성을 듣고 하루는 김유신이란 사람을
먼발치에서 보게 되었는데,
순간 까닭 없이 오금이 저리며 등에서는 소름이 돋고 전율이 흘렀다.
유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뜨거운 기운에 그만 진저리를 쳤던 것이다.
백석은 본래 사람을 대하면 대개는 상대방의 천성이 눈에 읽히고,
태생이 감지되며, 과거의 일과 장래의 운명 따위를 거울 들여다보듯 꿰뚫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자였다.
그런데 유신을 보는 순간 백석에게 떠오른 것은 거대한 산이나 바위를 마주 대하고 선 듯한
답답함과 막막함뿐이었다.
“저 사람은 하늘이 낸 인물이다.
칠요(七曜)의 정기를 얻어 태어난 사람을 내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백석에게 비친 유신은 백부 춘남의 환생 여부는 물론이려니와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어떤 것도 파악하지 못할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막연히 두려움을 느끼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일변 생각하니 바로 유신과 같은 인물을 없애는 것이 장왕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요,
백제의 왕업을 돕는 길이며, 아울러 자신의 앞날을 빈틈없이 닦아놓는 방책이기도 했다.
그는 우선 용화향도의 일원이 되어 적당한 기회를 노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회를 얻었고, 유신을 유인해 금성을 떠날 때는 감격에 겨워
내심 쾌재를 불렀던 것인데,
일의 성사를 코앞에 두고 느닷없이 금성으로 돌아가자니
의아한 중에도 난감하고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러구러 가만히 눈치를 보니 자신을 의심하는 것은 아닌 듯하고,
또 스스로 돌아봐도 특별히 의심받을 짓을 한 적이 없는 터라 하루 이틀 늦게 가는 것이 무슨 대수랴,
마음을 편히 가지기로 했다.
그런데 백석이 유신을 따라 금성에 돌아오자 일은 예상과 판이한 쪽으로 전개되었다.
유신은 자신의 집 대문을 들어서는 즉시 다짜고짜 백석의 팔을 우악스레 그러쥐었다.
힘깨나 쓴다고 자부하던 백석이었지만 사람 손에 죽지를 붙잡힌 닭처럼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실로 무서운 완력이었다.
“어, 어째 이러십니까요, 도련님?”
백석이 천둥에 뛰어든 개처럼 어쩔 줄 모르고 더듬거리자
유신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백석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는 누구냐!”
“누, 누구라니요? 소, 소인은 백석입니다요!”
“네 이놈!”
“도, 도련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요?
소인이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요.”
엉정벙정 지껄이는 소리에도 유신은 미동도 하지 않고 백석을 쏘아보기만 했다.
한동안 백변한 안색으로 허둥대던 백석도 유신의 그 차가운 눈빛과 시퍼런 서슬에 질려
급기야 고개를 푹 떨구었다.
“누구냐? 바른 대로 말하라.”
기세를 제압한 유신이 다시금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조용히 다그쳤다.
백석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닫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말씀을 드리지요.”
그는 만사를 체념한 듯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는 본래 백제 사람이오.”
한번 말문을 열자 백석은 의외로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되어 모든 사실을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백석의 입을 통해 모든 경위를 다 알고 난 유신은 약간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물었다.
“하면 너는 원한을 품은 자가 죽어 다시 인도 환생하는 기사이적(奇事異蹟)을 믿으며,
그렇게 죽은 너의 백부 춘남이 정말 나라고 여기느냐?”
“나는 점을 치는 점쟁이올시다.
윤회를 믿고 전생과 내생을 믿으며 그와 관련된 갖가지 기문벽서를 섭렵하였소.
그럴 공산이 크다고 여깁니다.”
유신은 그제야 백석을 움켜쥔 손을 놓고 대청 마루에 허탈한 모습으로 주저앉았다.
백석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선 채로 허공만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마치 지루한 싸움에서 기진맥진한 사람들처럼 한참을 그렇게 맥없이 보냈다.
착실히 밥 한 솥 지어낼 만큼의 시간이 흘러가고 났을 때 유신이 드디어 괴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간의 정리를 감안하면 너를 살려주고 싶다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세 가지다.
첫째 내가 너를 놓아주면 너는 당장 백제로 돌아갈 것이요,
둘째는 네가 우리나라의 지형 지세와 화랑들의 훈련소 따위를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너 하나를 살려보냈다가는 이내 10만 군사를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또한 너의 임금에게 다시는 이와 같은 치졸하고 야비한 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가르쳐주자면
너의 목을 쳐서 돌려보내는 길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전쟁터에서도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이 병가의 오랜 미덕이거늘
하물며 평시에 자객을 보내 이웃 나라의 백성을 해치는 일이 어찌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으랴.
환생을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개인의 소관이지만 명확하지도 않은 일로 사람을 죽이려고 꾀하다니
너는 물론 너의 임금 역시 천하의 개망나니가 틀림없다.
그런 자를 임금으로 둔 백제 백성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내 비록 삼한의 인정을 아는 사람이지만 눈물을 머금고 네게 죗값을 묻는 것은 너의 임금을
천추의 우스갯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니 너 또한 사내장부라면 불의를 응징하려는 나의 뜻을 거역하지 말라.
어차피 누구나 한 번은 죽는 법이 아니더냐?”
유신의 말뜻은 준엄하고 단호했지만 그 소리는 지극히 낮고 조용했다.
흡사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모든 사실을 술술 털어놓았던 백석도 초연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목전에 닥친 죽음을 예감한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공대하던 말투를 바꾸어 이렇게 말했다.
“그대를 유인하여 죽이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붙잡혔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내 앞에서 우리 임금을 능멸하는 소리가 귀에 몹시 거슬릴 뿐이다.
내 목이 떨어지고 나면 불경한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니 어서 목을 쳐라.
장부가 뜻을 세워 일하다가 죽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유신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벽에 걸어둔 보검을 내렸다.
그사이에 백석은 마당 한복판에 허리를 곧추세운 채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이 또한 삼한이 하나가 되지 못해 생긴 일이다.”
말을 마치자 보검을 휘둘러 순식간에 백석의 목을 떨구었다.
청룡검에 처음으로 사람의 피를 묻히는 순간이었다.
유신은 직접 시신을 수습하고 사람을 사서 백제로 보내면서 장왕의 그릇된 처사를
준절히 꾸짖는 글과 함께 자신의 성명 석 자를 관 속에 봉박았다.
백제 임금 부여장은 백석의 시신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는 유사에 명하여 백석을 후히 장사지내게 하고 따로 길일을 택해 오합사가 들어앉은
성주산에 묘를 썼는데, 얼마 뒤 꿈에 죽은 백석이 나타나서,
“신이 음부에 와서 백부 춘남을 만났으니 임금께서는 과히 걱정하지 마소서.”
하는 말을 듣고는 오합사에 명해 백석뿐 아니라
춘남의 혼백까지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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