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8장 남역(南域)평정 2

오늘의 쉼터 2014. 9. 11. 12:57

제18장 남역(南域)평정 2

 

 

흑치사차와 문진은 밤중에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여 뒷날 아침 일찍 늑노현에 닿았다.

장왕이 이곳을 공격 목표로 삼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즉위 초부터 그의 관심은 줄곧 신라가 중국과 교통하는 유일한 길목인 당성군(화성군)을 되찾는 데

있었다.

성왕이 관산성에서 패하고 신라가 당은포(당진)를 얻어 서해의 뱃길을 열게 되면서 백제의 국운이

쇠락하였다고 믿어온 장왕으로서는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서해에서 신라군을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썼고, 그러기 위해선 금성에서 당성군으로

통하는 7백릿길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그간의 모든 공격은 주로 국원(충주) 변방의 모산성(진천) 일대로만 집중되었으며,

드디어는 모산성을 취함으로써 그 일대에 팽팽한 긴장과 함께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장왕의 목표는 이제 당성군만이 아니라 남역 평정이었다.

이를테면 당성군을 되찾는 일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신라의 심장부인 금성을 공격하기로

야심을 품은 마당이었다.

당연히 그의 관심도 북방에만 머물지 않고 동남방의 덕유산이나 지리산으로 선회하였다.

그는 장차 그쪽으로 대군을 내려고 마음을 도슬러 먹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를 감추고 위장하기 위해서는 그의 관심이 여전히 북방에 있다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두번째 이유는 이번 출정이 어차피 신라군의 허실을 탐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으므로

한번 군사를 내어 여러 곳의 반응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곳이라야 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바로 늑노현이었다.

지형이 마치 쇠뇌처럼 생긴 늑노현은 일선주(선산)의 속현으로 속리산 서쪽 접경에 있었는데,

정작 일선주와는 산을 격하고 있어 오히려 국원에서 오고 가기가 더 수월했다.

늑노현을 친다면 일선주와 국원의 움직임을 동시에 엿볼 수 있었고,

어쩌면 금성에서도 원군이 당도할지 모르는 일이어서 신라의 전략을 읽기에는

그보다 더 적합한 곳이 없었다.

장왕은 흑치사차와 연문진에게 미리 자신의 이와 같은 생각들을 밝히고 되도록 시일을 끌며

기다렸다가 적장들의 면면과 용병술을 눈여겨보고 돌아오라고 지시하였다.

선군을 이끌고 먼저 늑노현 접경에 도착한 흑치는 군사를 두 패로 나눠 진채를 만들고

일부러 요란하게 북을 울리며 신라군의 동태를 엿보았다.

그러자 돌로 쌓아올린 작은 망루에서 일제히 봉화가 오르고 곧 현의 외성으로부터

한 패의 군마가 달려나오더니 앞선 장수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는 무엇을 하는 놈들인데 이른 아침부터 이토록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가?”

흑치가 보니 힘깨나 쓰게 생긴 체구에 손에는 큰 칼을 뽑아 든 것이 장수로선

제법 위용이 있는 듯했다.

“나는 부남에서 온 흑치사차로 우리 대왕의 명을 받들어 늑노현을 취하러 왔다.

늑노현은 본래 우리 백제의 땅이었는데 너희가 강제로 빼앗아가서 오랫동안 돌려주지 않으니

부득이 창칼로써 되찾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구나.

만일 외성의 문을 열어 항복하면 죄를 묻지 않겠지만 저항하는 자에게는 오직 죽음이 따를 뿐이다.

선택은 네가 하되 지체 없이 당장 대답하라!”

흑치가 단신으로 말을 몰고 나가 응수하자

신라 장수는 문득 목소리를 높여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생긴 것도 괴상망측한 놈이 어디서 이상한 것을 처먹고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게로구나.

감히 어딜 와서 무엇을 달라고 하느냐?”

그는 손가락질을 해가며 흑치의 검은 이를 비웃었다.

“나는 국경의 당주로 장춘 장군께서 특별히 신뢰하는 사담(斯擔)이라고 한다.

썩은 이를 몽땅 뽑아놓기 전에 냉큼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라!”

흑치는 사담의 말을 듣자 크게 격분하여 칼을 뽑아 들었다.

“내 어찌 너를 용서할 수 있으랴!”

이윽고 거세게 말을 달려나간 흑치사차와 사담이 한데 어우러졌다.

칼과 칼이 맞닥치며 삼사 합을 겨루었을까.

하지만 당초의 호기와는 달리 사담은 흑치사차의 적수가 아니었다.

“다음에 보자!”

힘에 밀리기 시작한 사담이 황급히 등을 돌려 달아나려는 찰나였다.

흑치사차가 맹렬히 말 배를 걷어차며,

“요놈, 어디를 도망가!”

하고 칼날을 세워 허공을 갈랐다.

다음 순간 사담은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를 땅에 뚝 떨구고 말았다.

“누구든 저항하는 자는 이 꼴이 되리라!”

흑치가 사담의 머리를 칼끝으로 찍어 들고 외치자

사기가 충천한 백제군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를 본 신라군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가까스로 외성에 이르자

곧 성문을 걸어 잠그고 위에서 어지럽게 시석을 퍼부었다.

흑치사차는 외성과 1백여 보의 거리를 격한 지점에서 할 수 없이 추격을 멈추었다.

문진이 이끄는 후군 1천여 기가 당도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8장 남역(南域)평정 4  (0) 2014.09.11
제18장 남역(南域)평정 3  (0) 2014.09.11
제18장 남역(南域)평정 1  (0) 2014.09.11
제17장 중국손님 (40)  (0) 2014.09.03
제17장 중국손님 (39)  (0) 2014.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