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4
한편 군사를 이끌고 늑노현에 당도한 장춘은 과연 식객이 말한 대로 현이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알고 크게 격분했다.
그는 현의 동편을 에워싸서 백제군의 동진을 차단하는 한편 휘하의 부장들과 이웃 삼년산군
(三年山郡:보은) 태수 녹부(綠扶)의 군사들을 데리고 현을 되찾을 방안을 강구했다.
지형의 생김새로는 백병전이 불가피했지만 언뜻 보기에도 적군의 숫자는 자신이 데려온 원군보다
갑절은 되지 싶었다.
그런데 태수 녹부에 이어 군주 장춘까지 친히 소경의 원군을 이끌고 늑노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차수는 곧 현의 향군과 당주들을 데리고 살매현을 떠나 원군의 진채를 찾아왔다.
차수를 본 장춘이 크게 노하여 꾸짖자 그는 장춘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늑노현에서 죽지 못한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올시다.”
“하면 어찌하여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났더냐?”
“전에 가잠성 성주 찬덕은 필사의 각오로 성을 지켰으나 원군이 오지 않아 처참하게 죽었고,
지난 병자년에는 모산성 성주 여귀(呂貴) 또한 홀로 싸우다가 죽었으나 어디에서도 원군은
오지 않았습니다.
근년에 이르러 백제는 걸핏하면 군사를 내어 우리를 침략하는데, 적군은 하나같이 잘 훈련되어
용맹하고 날렵하기가 범과 같으나 우리 군사들은 기껏해야 시석이나 다루는 향군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군장을 제대로 갖추고 조석으로 훈련한 원군들이 오지 않으면 향군으로 적을 물리치기란 마치 애가
어른을 상대하는 것과 같으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저는 조금이라도 가치 있게 죽기 위하여 잠시 목숨을 보전하면서 원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렸을 따름인데 이제 장군께서 오셨으니 흔쾌히 나가 싸우겠습니다.”
차수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이라도 하듯 갑옷을 갖춰 입고 말잔등에 뛰어올랐다.
그리곤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장창을 꼬나 쥔 채 현을 장악한 백제 진영으로 내달았다.
“적장은 들으라! 너희 백제 족속들은 입으로는 옹서지국과 부녀지간을 운운하면서도 걸핏하면
군사를 내어 장인과 부모의 나라를 짓밟으니 아무리 마나 캐어 팔던 천박한 잡놈이
왕 노릇을 한다 해도 어찌 번번이 이럴 수가 있더란 말이냐?
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너희를 징벌하러 왔거니와 하늘이 두렵지 않은 자는 앞으로 나오라!
오상의 예를 저버린 금수 같은 것들에게 처참한 종말을 보여줄 것이다!”
차수는 단기필마로 현의 경계에 이르러 큰소리를 쳤다.
“대체 저놈이 누구냐?”
늑노현 동편 망루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흑치사차가 주위에 대고 묻자
현민 가운데 하나가 현령 차수라고 일러주었다.
흑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백제 진영에서 한 젊은 장수가 나섰다.
“제가 저 자의 나불거리는 주둥아리를 목에서 떼어놓겠습니다.”
흑치가 보니 길지의 아들 은상이었다.
흑치는 도성을 떠나올 때 장왕의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으나 이미 현은 점령한 뒤였고
창칼이 난무하는 위태로운 상황도 아니어서 차제에 은상의 무예나 구경해두자 싶었다.
그러나 그는 허락을 한 뒤에도 한마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현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차수란 자의 창술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너는 가서 싸우되 만일 내가 징을 쳐서 부르면 언제든지 싸우기를 그치고 지체 없이 돌아와야 한다.
알았느냐?”
은상은 흑치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빛 갈기를 휘날리는 과하마에 올라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 길지가 쓰던 검을 잡고 말 배를 걷어찼다.
은상이 쏜살같이 차수를 향해 달려가자 현의 반대편 망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진이
급히 흑치에게 와서 말했다.
“저 아이의 무예가 어떤지를 알 수 없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소.
자칫 혈기를 앞세우다 화를 입는다면 이 다음에 죽어 길지 형님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소?
내가 말을 타고 나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소.”
그러나 문진의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주위에서 돌연 커다란 함성이 일었다.
흑치와 문진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기세 좋게 날뛰던 차수의 모습은 뵈지 않고
은상이 칼끝에 사람의 목 하나를 꿴 채로 천천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찌 된 노릇이냐?”
이야기를 하느라 은상의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한 흑치와 문진이 주위에 물으니
흑치의 부장 가운데 하나가,
“교전한 지 단 1합에 적장의 목을 베었습니다.”
신이 나서 말하고,
“번갯불도 은상의 칼놀림보다는 빠르지 못할 것입니다.”
하며 은상의 검술을 극찬하였다.
그제야 두 장수는 길지 아들의 무술이 그 아버지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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