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 언제나 꿈을 꾼다(7)
(1547) 언제나 꿈을 꾼다-13
전주의 특징은 한옥마을뿐만이 아니라 시내에 문화재급 건물과 보물, 사적,
거기에다 향토 음식점이 모두 모여 있어서 걸으면서 다 즐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택시를 타도 모두 10분 거리 안에 있으니 도시 전체가 문화재를 안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애진이 조철봉을 안내하여 일부러 걸은 것도 그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조철봉은 옛 전라감영 건물인 전주객사와 풍남문, 경기전 앞을 지나 한벽당에 이르렀는데
어느덧 역사의 향기에 젖어 있었다. 입을 열어 소리를 뱉으면 그냥 창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옆에 애진이 있었기 때문에 흥이 난 것이다.
조철봉은 전주가 조선의 시조 이성계의 본향인 줄은 처음 알았다.
전주 이씨는 여러 명 알고 있었지만 이곳이 그들의 뿌리인 것이다.
오목대가 바로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남원 황산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돌아가던 중
자신의 조상인 목조(이안사·5대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이었다.
한벽당에 서자 앞으로 전주천과 남고산이 보였다.
저녁 무렵이어서 불빛을 받은 도시의 야경이 그림 같고 시내 복판인데도 조용했다.
그리고 이 냄새.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켰다.
“매운탕 좋아하세요?”
애진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매운탕 냄새였다.
한벽당 앞쪽 전주천을 따라 늘어선 음식점에는 모두 매운탕 메뉴가 적혀 있었다.
천변에 내놓은 평상마다 손님들이 가득 둘러앉았는데 냄새는 그곳에서 풍겨왔다.
애진이 그중 한 곳의 빈 평상으로 조철봉을 안내하더니 매운탕을 시켰다.
오모가리라고 한 것 같았다.
소주 드실 것이냐고 물었으므로 두말 않고 머리만 끄덕였다.
“전주 음식은 맛이 있다고 소문이 났죠. 알고 계시죠?”
평상에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애진이 물었다.
“아, 그럼요.”
주위를 둘러본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었다.
“분위기도 좋고, 외국 사람들이 몰려올 만한데, 음식 때문에라도 말이죠.”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조철봉이 슬쩍 애진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7시2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애진의 아르바이트 직장인 편의점에 출근할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으므로 조철봉은 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가족은? 고향은 전주십니까?”
“네, 여기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가족은 어머니하고 저하고 수정이까지 합해서 셋이구요.
제가 외딸이거든요.”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애진이 눈웃음을 쳤다.
“애 아빠는 고향이 충청도라 모두 그쪽에 있어요.”
“그렇군요.”
남편이 죽었으니 그쪽 집안과는 왕래가 끊겼을 것이다.
그때 종업원 둘이 상을 받쳐들고 왔는데 푸짐했다.
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음식상 가운데에 커다란 냄비가 놓여 있고
매운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꼭 만족한 화합을 할 때의 탄성이었다.
꽉 찬 느낌의 쾌감이 덮쳤을 때 이런 탄성이 나온다.
수저를 들어 매운탕 국물을 한모금 삼킨 조철봉이 다시 머리를 끄덕이며 탄성을 뱉었다.
진하고 시원하다.
뜨거운 것을 시원하다고 표현하면 미친 놈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쩌랴?
뜨겁고 맵고 시원하고 담백하다.
다 들어있다.
(1548) 언제나 꿈을 꾼다-14
매운탕에는 소주다. 한국인의 입맛에 이만큼 맞는 술과 안주가 있을 것인가?
조철봉은 오모가리 안주에 소주 한 병을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 마시고는
만족한 얼굴로 애진을 보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딱 맞다.
배가 든든해지자 앞에 앉은 애진의 자태가 세 배는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다.
느낌이 확 다가갔기 때문이다.
애진은 소주잔을 손끝으로 조몰락거리면서 마침 옆쪽 전주천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는데
옆모습이 그림 같았다.
이미 주위는 짙게 어둠에 덮여 있었지만 등빛에 비친 애진의 얼굴 윤곽은 더 짙어졌다.
그때 문득 애진이 머리를 들었으므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 저 때문에 알바 못 나가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조철봉이 묻자 애진은 눈웃음을 쳤다.
“오늘 쉰다고 했어요.”
“그래도 됩니까?”
“두 달이 넘도록 한 번도 안 쉬었는데요, 뭐.”
“이런, 저 때문에.”
“아뇨, 저도 쉬어야죠.”
그러더니 애진이 빈 술병을 들고 물었다.
“술, 더 드시겠어요?”
“아니, 저는 됐습니다.”
조철봉이 사양했다.
맛있게 음식을 먹고 난 후여서 더 이상 술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술기운을 빌려 작업을 하는 조철봉이 아니다.
“그럼 가요.”
애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서둘러 식당 주인한테 계산을 하고 돌아왔다.
“내가 차라도 한잔 사지요.”
전주천변 길을 걸으면서 조철봉이 말하자 애진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래요. 집 근처에 전통 찻집이 있어요. 거기서 호텔도 가까워요.”
“이렇게 걸어서 데이트 하는 건 오래됐습니다.”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옛날 일을 떠올리는 시늉을 했다.
“여기가 처음인데도 영 낯설지 않고 포근하네요.”
물론 그 이유의 절반 정도는 옆에 있는 애진의 영향일 것이다.
애진은 오늘 저녁 식당에서 3만원가량 지출을 했다.
편의점 알바 이틀분의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둘은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도시의 불빛은 휘황했다.
번쩍이는 불빛은 이곳 또한 치열한 생존경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명처럼 느껴졌다.
도시의 역동성은 밤에 잘 드러났다.
“저기요.”
어느덧 거리의 분위기에 취해 있던 조철봉은 애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애진이 눈으로 가리킨 곳은 전통 한옥구조로 된 찻집이었다.
찻집 안으로 들어서자 한옥 구조였지만 편하도록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고
벽에는 벽거리용 TV도 걸려 있다.
그러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벽쪽 테이블에 앉아 인삼차를 주문하고 났을 때 애진이 물었다.
“언제 가실 거죠?”
“글쎄.”
머리를 기울였던 조철봉은 애진을 보았다.
서울에서 전주까지는 세 시간이면 된다.
KTX를 타고 시간 잘 맞추면 두시간 반에 올 수도 있다.
“자주 보고 싶은데 괜찮겠지요?”
“사모님은 어떻게 하시고요?”
애진이 웃음 띤 얼굴로 물었지만 곧 입술끝이 조금 굳어지는 것을 조철봉은 놓치지 않았다.
노는 여자, 좋게 말해서 깨친 여자, 바꿔 말해서 21세기 여자는 결코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유유상종인지는 모르지만 조철봉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을 하는 여자는 못 만났다.
그래서 그런지 가슴이 감동으로 또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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