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 언제나 꿈을 꾼다(5)
(1543) 언제나 꿈을 꾼다-9
그러자 이애진이 소리내어 짧게 웃었다.
웃는 모습이 좋다. 중국의 미인 서시는 찡그린 모습으로 한판 잡았다고 했지만
웃는 모습은 영 아니올시다란 설이 있다.
찡그린 모습으로 날렸던 서시의 말로가 비극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웃는 모습이 좋은 인간에게 복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조 선생님은 웃겨요.”
“예, 실컷 웃으십시오.”
여전히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애진씨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아주 선수이신 것 같아요.”
불쑥 그렇게 말했던 애진이 주춤 걸음을 멈추고는 정정했다.
“죄송해요. 너무 태도가 자연스러워서요.”
“절박했기 때문이죠.”
“뭐가 절박해요?”
“모르십니까?”
어깨를 늘어뜨린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어느덧 둘은 한옥거리와 도시의 중간지점에 멈춰 서 있었다.
마악 한옥마을을 벗어나려는 지점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난 언제나 꿈을 꿉니다.”
돌담에 붙어 선 애진이 눈만 깜박였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내 공상 속에서 수많은 여자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상황도 일어나지만.”
그러고는 조철봉이 애진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오늘처럼 꿈보다 더 멋진 현실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또.”
했지만 애진이 흘겨보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조 선생님, 진도가 너무 빨라요.”
“나한테 시간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두요.”
그러더니 애진이 두 손바닥을 펴고 조철봉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가요.”
그러나 애진의 손바닥이 일초쯤 닿았다가 떨어졌을 뿐인데도 조철봉의 철봉은 무섭게 치솟았다.
바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으므로 조철봉은 배가 아픈 것처럼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다행히 밤이어서 치솟아 오른 사타구니는 좀 가릴 수 있었다.
애진이 보지 못하도록 몸을 비틀거나 물러서며 걸었다.
대낮에는 도저히 이 꼴로 걷지는 못할 것이다.
누가 보면 바지 속에다 우산을 펼친 줄로 알 것이다.
“여기예요.”
하면서 애진이 멈춰선 곳은 3층 연립주택 앞이었다.
12시가 넘었기 때문인지 드문드문 불은 켜졌지만 주위는 조용했고 앞쪽 골목에는 인적도 없다.
애진이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드러난 눈동자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 선생님, 오늘은 이만요.”
“그럼 내일은 나한테 시간을 내 주실랍니까?”
“내일도 알바까지 해야 되기 때문에.”
애진이 머리를 저었다.
뒤쪽에서 가로등 빛이 건너왔기 때문에 애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조철봉의 표정을 본 애진이 웃었다.
쓰다듬는 것 같은 웃음이다.
“미안해요, 조 선생님.”
“내가 며칠 이곳에서 쉴 겁니다.”
조철봉이 불쑥 말했지만 이 생각은 아까 찻집에서부터 움터서 커졌다.
애진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회사 일도 있고 해서요. 그래서 말인데.”
상반신을 조금 기울인 조철봉이 애진을 보았다.
애진한테서 옅은 향내가 났다.
여자 냄새는 다 다르다.
같은 향수를 써도 그렇다.
그걸 아는 놈은 드물다.
(1544) 언제나 꿈을 꾼다-10
“내일 낮에 같이 점심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철봉이 매달렸다.
얼굴에는 간절한 표정이 떠올라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조철봉은 이 장면에 부닥친 여자의 가슴이 희열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면서 업적이나 발명, 또는 성취감 등을 공유해야 된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말싸움이다.
그건 그것이고 지금 조철봉과 이애진은 남녀 본성의 문제로 부닥쳐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자는 이 순간 행복해야 정상이다.
설령 상대가 싫더라도 마찬가지로, 프러포즈를 받는 순간은 들떠야 된다.
그래야 세상이 원만해진다.
애진이 조철봉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차분하다.
그러나 분명히 속은 감동을 먹고 있으리라.
애진의 시선을 맞받으며 조철봉은 속으로 다짐했다.
진짜 전주에서 왕건이를 건졌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만일 지금 이 상황에서 아, 예, 하고 물러난다면 애진은 실망할 것이었다.
한두번 거절했다고 싹 몸을 돌리는 남자에게 미래는 없다.
그 당시에 제 똥폼은 살아날지 몰라도 돌아가서 라면 끓여 먹고 오형제하고 놀 일밖에 없다.
“저기요.”
하고 애진이 입을 열었다.
가늘게 숨을 뱉고 난 애진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애 점심을 먹여야 되거든요. 그래서 곤란해요.”
“애 점심을?”
졸병처럼 복창한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애가 몇 살인데 그럽니까?”
“일곱살이오.”
“아, 애가 집에 혼자 있어서….”
“아뇨, 외할머니하고 같이 있어요.”
애진이 눈으로 연립주택을 가리켰다.
“애가 아파요.”
조철봉이 눈만 껌벅였으므로 애진이 다시 웃었다.
“그쯤만 아시면 돼요.”
“그럼 저녁은 어떻습니까? 저녁도 집에서 드시는 건 아니죠?”
“화랑에서 6시에 퇴근하니까 한시간밖에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그 한시간도 좋습니다. 아니….”
조철봉이 결연한 표정으로 애진을 보았다.
“내가 그 화랑으로 가지요.
거기서 같이 퇴근하고 나오면 시간도 절약되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안 돼요.”
했지만 애진의 얼굴에 옅게 웃음기가 떠올라 있는 것을 조철봉은 놓치지 않았다.
“화랑 위치를 알려 주시죠. 아니면 전화번호라도.”
조철봉이 말하자 애진은 머리를 저었다.
“저, 화랑에서 쫓겨나는 걸 보고 싶으세요? 안 돼요.”
“제가 손님으로 가면 안 됩니까? 눈치 채지 못하게 하지요.”
“그래도 안 돼요.”
“그럼 화랑 근처에서 기다리지요.”
“아이 참.”
했지만 애진이 곧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말을 이었다.
“고사동의 한국화랑이에요. 시내에서 물어보면 다 알아요.”
“고사동의 한국화랑.”
“화랑 건너편에 커피숍이 있어요. 영원커피숍.”
“영원커피숍.”
“거기서 6시10분에 뵈어요.”
“6시10분.”
또박또박 복창한 조철봉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애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일 6시10분에 영원커피숍에서….”
조철봉은 애진이 내민 손을 잡았다.
손은 따뜻했고 그 순간 다시 온몸에 열기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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