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475. 언제나 꿈을 꾼다(4)

오늘의 쉼터 2014. 9. 9. 13:40

475. 언제나 꿈을 꾼다(4)

 

 

(1541) 언제나 꿈을 꾼다-7 

 

 

 

 

 조철봉은 앞에 앉은 여자를 보았다. 한옥마을의 찻집 안이다.

 

천장에 달린 등이 흔들리면서 여자의 얼굴 윤곽이 짙어졌다가 섬세한 선으로 변했다.

 

조물주의 신통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세상에 수천만의 미인이 있지만 제각기 다른 것도

 

그 증거일 것이다.

 

물론 분위기도 한몫은 한다.

 

같은 모습의 여자가 꽃밭에 서 있는 장면하고 분뇨차 옆에 있을 때하고 다르게 보이는 것이 그렇다.

 

그것에 똑같은 감동을 받는다면 아마 코가 막혔거나 눈이 뒤집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전 이애진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먼저 제 이름을 밝혔다.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나이는 서른 안팎이다.

 

여자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앉은 채로 머리를 숙였다.

“저는 조철봉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이름을 더 섹시하게 치장하려고 성에다가 시옷자 받침까지 덧붙였지만

 

오늘 이 여자 앞에서는 철의 리을 받침을 슬쩍 니은으로 바꾸었다.

 

술기운이 아직 퍼져 있는데도 이런 것은 분명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애진이 말했다.

“하루에 두 번이나 한옥마을에 오셨네요. 좋으셨던 모양이죠?”

“아, 좋았습니다.”

대번에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지그시 애진을 보았다.

 

애진을 만날 줄 알았다면 하루에 열 번도 왔을 것이다.

 

아니, 종일 이곳에서 오락가락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조철봉이 시선을 준 채로 물었다.

“애진씨는 이곳에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하루에 두 번이나 마주쳤으니까 말입니다.”

그러자 애진이 싱긋 웃었다.

“제 직장하고 집 사이에 한옥마을이 있거든요.

 

그래서 하루에 세 번씩 지나죠.”

“세 번씩.”

“점심 때는 집에 애 점심 차려 주고 가는 길이었고,

 

아까는 알바 마치고 집에 가는 중이었죠.”

“아하.”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또 물었다.

“직장은 뭐고 알바는 뭡니까?”

“낮에는 화랑에서 일합니다.

 

그리고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는 편의점 알바를 하죠.”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애진이 다시 싱긋 웃었다.

“열심히 살죠.”

“그렇군요.”

애진의 표정은 밝고 자연스러웠다.

 

꾸민 얼굴은 금방 표가 난다.

 

조철봉이 누구인가?

 

사기꾼으로 입신한 인간이 아닌가.

 

상대의 말과 표정을 일분만 보면 꾸몄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가 있다.

차를 시키고 났을 때 조철봉이 다시 은근한 시선을 주었다.

 

이 시선은 색감이 발달한 상대방이 본다면 금방 다리 사이가 근지러울 만큼 강렬했다.

 

실제로 조철봉은 상대방한테서 그런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지금 조철봉은 그런 시선을 주고 있었지만 애진은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애진이 색감(色感), 또는 성감(性感)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도 되었다.

 

그렇다고 조철봉은 애진의 반응에 실망하지 않는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성현의 말씀을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개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안다.

 

개가 사람을 바라보는 형국이니 자존심 상할 것도 없다.

 

제 자신만 잘 알면 상처도 적어진다.

“그런데, 애진씨.”

그 시선을 그대로 보내면서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남편께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십니까?” 

 

 

 

 

(1542) 언제나 꿈을 꾼다-8

 

 

 “아뇨.”

이애진이 대번에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뜨끔했다.

 

그때 가져온 유자차 잔을 들면서 애진이 말을 이었다.

“애 아빠는 죽었어요.

 

3년 전에 뺑소니 차에 치여서요.”

조철봉은 숨을 죽였다.

 

유자차를 한 모금 삼킨 애진이 다시 웃음 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 선생님은 결혼하셨죠?”

애진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일초쯤 망설였으므로 표시는 안 났다.

 

다른 때 같았으면 틀림없이 마누라가 죽었거나 이혼을 당했다면서 의연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때 처량한 몰골을 보이면 금방 동정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십중팔구 작업이 성사되지 않는다.

 

여자는 당당한 남자를 좋아한다.

 

그것은 고전에도 다 나와 있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예, 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작업 성공률이 높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이 하나 있지요.”

“그러세요.”

애진의 표정이 더 부드러워졌다.

“전 딸이 하나 있는데.”

“아하.”

조철봉이 애진의 말을 더 기다렸지만 이어지지 않았다.

 

슬쩍 훔쳐본 손목시계가 밤 12시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었다.

 

아무리 남편이 죽은 상황이라고 해도 딸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조철봉의 가슴은 초조감과 기대감이 절반씩 차지한 상황이었다.

 

애진이 시간을 끌수록 기대감은 늘어날 것이다.

 

그때 애진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텔레파시다.

 

시간에 대한 조철봉의 느낌이 통한 것 같다.

“늦었네요.”

그러더니 애진이 옆에 놓인 가방을 집었다.

“집에 가야겠네요.”

“제가 모셔다 드리죠.”

따라 일어선 조철봉이 앞장을 서며 말하자 애진은 가만있었다.

 

찻집을 나왔을 때 거리의 행인은 드물었다.

“여기서 5분 거리예요.”

발을 떼면서 애진이 말하더니 옆을 걷는 조철봉을 보았다.

“참, 선생님은 뭘 하세요?”

“예, 자동차 서비스 공장을 합니다.

 

여기에도 공장이 있지요. 오성자동차라고.”

조철봉이 여자한테 이렇게 정직하게 밝힌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저도 모르게 술술 그렇게 뱉고 난 후에야 조철봉은 그것을 알았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꼭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인간이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일 때는

 

갈 때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계속해서 나왔다.

“오늘 공장 기념식에 온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분위기를 겪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지요.”

“어떤 분위기인데요?”

“지금 같은.”

조철봉이 다시 은근한 시선으로 애진을 보았다.

“애진씨 같은 분을 만날 줄 몰랐습니다.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입니다.”

“어떤 느낌이신데요?”

웃지도 않고 애진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이 말은 많이 써먹었다.

 

그러나 써먹을 때마다 진정성이 우러난다.

 

배우가 연극에 몰두하면 바로 그 극중 인물이 되어서 관중을 끌어들이듯이

 

조철봉도 여자를 끌어들인다.

 

배우 이상으로 절절한 표정으로. 조철봉이 애진을 똑바로 보았다.

“가슴이 터질 듯한 느낌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성욕으로 가슴이 아니라 바지 지퍼가 터지려고 한다.

 

애진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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