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 언제나 꿈을 꾼다(2)
(1537) 언제나 꿈을 꾼다-3
“여기 아무 곳이나.”
하면서 멈춰 선 여자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도청 근처의 식당가였다.
식당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아무 곳이나 들어가라는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또 빙긋 웃었다.
“다 맛있어요.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이런 소개도 있단 말인가?
자신만만한 것 같게도 보였지만 무성의한 소개로 오해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잿밥에만 눈이 먼 조철봉이 그 소개를 건성으로 들은 채 정색하고 여자에게 말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제가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요.”
“전 점심 먹었어요.”
“그렇다면 차나 같이.”
“아니, 식사는 안하시고요?”
밥보다 다른 게 먼저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조철봉이 난처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았다.
그때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식사 잘 하세요.”
“아니, 잠깐만.”
다급해진 조철봉이 한 발짝 다가섰다.
“시간 좀 내주시지요. 이 기회를 놓치기가 싫습니다.”
“기회라니요?”
“이렇게 만나게 된 기회 말입니다.
이 우연이 그냥 만들어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조철봉을 빤히 보았다.
조철봉의 표정은 절박했다.
이 표정을 본 여자의 절반은 모성 본능의 자극을 받았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중 2할은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철봉은 여자가 쳐다보는 약 3초 동안의 순간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염원했다.
그러자 표정이 더 절박해졌다. 이윽고 여자가 말했다.
“식사하시고 오목대로 가 보세요. 시내가 내려다 보일 테니까요.”
“그럼 오목대에서.”
“한벽루도 가보세요.”
“예. 한벽루도.”
그러자 여자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탐스러운 엉덩이를 흔들면서 걷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 호외적인 절반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머지 절반의 세부 자료는 없다.
조철봉이 겪은 여자들이 아니니까.
싫다고 떠난 여자들한테서 어떻게 자료 수집을 하겠는가?
그래서 조철봉은 엉겁결에 바로 옆쪽 식당에 들어가 백반을 시켰다.
정신이 멍했기 때문에 종업원이 백반 시킬 것이냐고 묻자 머리만 끄덕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음식이 날라져 왔을 때 정신이 났다.
한 가지, 두 가지 하고 반찬 접시를 세다가 나중에는 헷갈려서 그만두었는데 스무 가지가 넘었다.
윤근수와 최갑중의 말이 맞는 것이다.
탕이 두 개나 되었고 찌개도 두 개, 조기구이에 돼지고기 볶음,
젓갈이 세 종류, 김치도 세 가지나 되었다.
계란찜, 두부볶음, 고등어조림…….
이렇게 세다가 머리를 들고 벽에 붙여진 차림표와 가격표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5000원. 서울에서는 이 차림만으로 몇만원은 받을 것이다.
우선 찌개 하나에 5000원씩, 구이와 조림도 각각 5000원, 볶음류가 각각 1만원,
탕도 각각 5000원, 이것만 해도 5만원이다.
그렇게 세다가 말고 조철봉은 수저를 들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윤근수의 말마따나 다 맛있다.
일품이다.
조철봉은 곧 여자한테 차인 아픔을 잊었다.
음식 맛이 여자한테 당한 상처를 가시게 하다니,
조철봉의 인생에서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다.
밥을 한 그릇 더 시켜 먹었는데도 주인은 추가로 밥값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조철봉이 화까지 냈지만 결국 받지 않았다.
식당을 나온 조철봉은 행복했다.
(1538) 언제나 꿈을 꾼다-4
저녁에 조철봉은 전주 공장장 박기호가 예약해 놓은 한정식집으로 들어섰다.
한정식집도 한옥 구조에 온돌방이었는데 이미 방에는 박기호가 여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방으로 들어선 조철봉의 입에서 다시 탄성이 나왔다.
방에 차려진 상이 그야말로 산해진미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은 처음 받았다.
오후에 먹은 5천원짜리 백반에도 기가 막혔던 조철봉이라 이번에는 눈만 껌벅였다.
“여기 앉으시지요.”
하고 박기호가 상석으로 안내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파트너 마음에 드십니까?”
“으응?”
그때서야 머리를 든 조철봉이 옆에 앉은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물론 한복 차림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머리를 숙였다.
둥근 얼굴, 눈초리가 조금 올라갔지만 산뜻한 느낌의 눈, 쌍꺼풀은 없다.
콧날은 부드러웠고 입술은 앵두 같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귀엽다.
“좋아.”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최갑중과 윤근수까지 방 안에는 넷이 모였고 여자도 넷이다.
조철봉이 괜찮다고 했는데 누가 제 파트너 타박을 하겠는가?
그런 놈은 제정신이 아니다.
술은 한정식집 자체에서 담갔다는 곡주였는데 청주 같았지만 도수가 높았고 맛이 달아서 잘 넘어갔다.
조철봉은 오후에 포식을 한 상태인데도 이것저것을 많이 집어먹었다.
그러다보니 술 주전자가 빨리 비워졌다. 안주 맛이 좋으니 술도 잘 넘어가는 것이다.
“저, 사장님. 창을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술기운이 적당히 올랐을 때였다. 박기호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전주는 국악으로 유명한 도시인 것이다.
요정에 가면 창을 듣는다는 것도 안다.
그러자 박기호의 눈짓을 받은 여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들은 벽장에서 가야금과 장구, 북을 꺼내더니 곧 앞 쪽에 벌려 앉았고,
조철봉의 파트너는 섰다.
창을 하려는 것이다.
조철봉은 긴장했다.
머리를 뒤에서 감아 올렸기 때문에 둥근 얼굴이 다 드러난 파트너도 긴장하고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김숙진. 똑바로 선 숙진의 자태는 마치 단아한 학 같았다.
곧 북과 장구, 가야금이 화음을 맞추더니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고는 숙진의 창이 시작되었다.
“심청전의 일부분입니다.”
박기호는 전주에 근무하면서 자주 이곳에 다닌 것이 분명했다.
국악대사습이나 공연때 찾아갈 리는 만무했으니 한정식당 겸 요정인 이곳에서 익혔을 것이다.
조철봉은 잠자코 숙진의 창을 들었다.
내용을 들으려고 귀를 세웠더니
화음의 신명을 놓쳤고 잠깐 숙진의 목소리에 넋을 잃었다가 내용을 못들었다.
그러다 곧 조철봉은 창에 빨려 들었다.
가슴이 미어지면서 눈물이 쏟아지려고 한다.
심청은 아버지 심봉사를 두고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떠나려는 것이다.
그때 창이 그치더니 박수 소리가 들렸으므로 조철봉은 눈을 떴다.
어느덧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앙코르! 브라보!”
번쩍 정신을 차린 조철봉이 손바닥을 두드려 박수를 치면서 소리쳤다.
항상 손목에 중국제 짝퉁 시계를 차고 다니는 터라 세게 박수를 치지 않았던 조철봉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도 잊어 먹고 박수를 쳤다.
틀림없이 시계 바늘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조철봉이 다시 소리쳤다.
“재창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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