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 언제나 꿈을 꾼다(3)
(1539) 언제나 꿈을 꾼다-5
한정식당 전주옥의 화장실은 마당을 건너야 했다.
조철봉이 화장실로 나왔을 때 최갑중도 따라 들어섰다.
조철봉의 눈짓을 받고 따라온 것이다.
소변구 앞에 나란히 섰을 때 조철봉이 말했다.
“저기, 내 파트너 말이다.”
“예, 형님.”
갑중이 형님이라고 부를 때는 사적 대화를 한다는 표시였다.
회사에서는 틀림없이 사장님 호칭을 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공장장은 주선하기가 어려운 눈치던데 네가 나서봐.”
“그러면.”
진저리를 치고난 갑중이 지퍼를 올리면서 물었다.
“데리고 나가시겠단 말씀입니까?”
“네가 주선하는 것으로 해서.”
“알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갑중이 덧붙였다.
“노래가, 아니, 창이 그렇게 가슴 속으로 파고 드는지 몰랐습니다. 좋던데요.”
“그래.”
조철봉도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감동 먹었다.”
갑중을 먼저 보내놓고 조철봉은 여유있게 움직였다.
밤 11시가 되어가고 있었으니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조철봉이 다시 방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서있던 숙진이 수건을 내밀었다.
더운 물로 소독한 수건이다.
수건을 받아든 조철봉이 숙진의 눈동자를 보았다. 검다.
숙진의 표정은 차분했다.
그렇게 열창을 하던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순간 조철봉의 몸에 열기가 뻗쳐졌다.
후끈 달아올랐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침실에서 숙진이 열창하던 때처럼 몸부림을 치며 절정에 오르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철봉이 자리에 앉았을 때 박기호가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러더니 남자 지배인이 들어와서는 여자들을 다 데리고 나갔으므로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해졌다.
갑중의 지시를 받은 박기호가 주인한테 공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들을 다 데리고 나간 것은 숙진 하나만 불러냈을 때 조철봉이 무안할 꼴을 당하게 하지 않으려는
수작이다.
잠시 후에 지배인이 다시 얼굴만 방안으로 들이밀더니 박기호를 데리고 나갔다.
그러자 갑중이 쓴웃음을 짓고 혼잣소리를 했다.
“거, 꽤 까다롭군.”
윤근수는 모른 척했지만 갑중이 말을 이었다.
“과연 절도가 있는 곳이구먼.”
그때 방안으로 박기호가 들어섰는데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호랑이 앞에서 똥을 밟은 얼굴이다.
화가 났지만 두려운 표정이었다.
“저기.”
박기호가 갑중을 향해 말했다.
“아가씨들이 이차 못나간다는데요.
여기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아니랍니다.”
“아하.”
하고 조철봉이 박기호의 말을 받았다.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그런 아가씨들한테 이차 가자고 한 건 실례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갑중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려 보였다.
“이봐, 때와 장소를 가려서 이차건 삼차건 주문을 해라.
왜 그렇게 똥 오줌을 못가리는거야?”
“죄송합니다.”
정색한 갑중이 머리까지 숙였다.
“제가 흥이 나다 보니까 실수했습니다.”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다.
윤근수는 물론이고 박기호도 실상을 알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 이런 일이 한두번인가?
세상사가 다 이렇게 알면서도 그냥 넘어간다.
(1540) 언제나 꿈을 꾼다-6
이번에도 똥 밟았다.
아니, 미끄러져 자빠졌다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른다.
전주옥을 나왔을 때 넷의 모습은 꼭 바지에다 오줌 싸놓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 같았다.
밤은 깊었지만 거리는 활기에 차 있었다.
곁을 지나는 선남선녀의 표정들도 밝다.
“자, 그럼.”
하고 조철봉이 세 사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전주옥에서 호텔까지는 택시 기본요금이라고 했다.
그래서 조철봉은 박기호가 대기시킨 승용차를 돌려보냈다.
“난 슬슬 걸어서 호텔로 돌아갈 테니까 자네들은 일 봐.”
밤 11시반에 볼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눈치 빠른 최갑중이 먼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지요.”
윤근수와 박기호도 서둘러 갑중을 따라 인사를 했으므로 조철봉은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발은 떼었지만 갈 곳이 없다.
객지에서 이렇게 혼자 밤을 맞기는 난생 처음이다.
또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술기운이 번진 상태로 거리를 걷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조철봉은 거리를 기웃거리며 걸었다.
도시는 아늑했다.
이차선 도로를 차들이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신구(新舊)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활기 한편으로 묵중한 전통이 드러나 있다.
조철봉은 문득 자신이 돌아본 외국 도시들을 떠올렸다.
그 순간 전통과 현대식 위용을 뽐내는 서구의 도시를 찾아가 감탄해 왔지만
제 나라도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시에는 제각기 맛이 있다.
도시의 맛은 분위기다.
어느덧 조철봉의 발길은 한옥마을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 바로 한옥마을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는 늦은 시간인데도 행인이 많았지만 모두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조용했고 쌍쌍이 많다.
길을 걷던 조철봉은 문득 자신이 2백년쯤 전의 거리를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앞쪽에서 다가오는 사람들도 그렇다.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와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소곤대며 지나갔고 이번에는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손을 쥐고
한옥 담장 밑을 걸어 다가왔다.
행복한 표정이다.
한 30년쯤 같이 산 것 같은데 저런 표정들을 짓고 있다니 잘 살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한옥마을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어디 이런 곳이 있단 말인가?
가끔 지나는 차만 안 다닌다면 금방 옆 골목에서 포졸과 군관이 나타나 음주 측정을 할 것만 같다.
갑자기 어디서 가야금 뜯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긴 이 동네에서 누가 부르는지도 모르는 요란한 댄스 음악을 튼다면 경찰이나 포졸이 나타나
잡아갈 것 같다.
소리 나는 곳을 찾아 몸을 비틀었던 조철봉이 앞쪽 골목에서 나오는 여자를 보았다.
낯이 익다.
가로등 빛에 비친 여자의 얼굴 윤곽이 뚜렷해졌을 때 다시 조철봉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낮에 만나 식당을 물었던 여자,
허리를 굽혔을 때 잠깐 드러났던 허리 살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까무잡잡한 피부, 튀어나왔던 허리뼈,
조철봉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길을 가로질러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오후에 만나놓고 다시 안녕을 묻는다.
인사말 뜻풀이를 하면 좀 어색했겠지만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웃었으므로
조철봉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다시 구경 나오셨어요?”
여자가 물어주었으므로 조철봉은 감동했다.
“예, 혹시.”
그러고는 지그시 여자를 보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뭘요?”
했던 여자가 이번에는 소리내어 짧게 웃었다.
“그나저나 또 만나게 되어서 인연입니다. 아주 좋은 인연.”
조철봉이 절실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인연인지 우연인지 이걸 놓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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