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 언제나 꿈을 꾼다(1)
(1535) 언제나 꿈을 꾼다-1
조철봉에게 전주는 초행이다.
대한민국 태생으로 한국에서 살았지만 전주를 안 가고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디, 전주뿐이랴? 대구도, 광주, 마산, 순천도 그렇겠지. 저하고 인연이 있는 곳이나 가고
피서철에는 동·서해안의 벽지까지 샅샅이 훑고 돌아다니지만 의외로 내륙쪽 도시,
또는 고도를 안 가본 사람이 많다. 동남아나 유럽, 아프리카까지 여행을 가면서
국내 지방 도시는 볼 것 없다고 무시하는 사람도 꽤 있다.
바로 조철봉이 그랬다.
그리고 지금의 전주행도 일 때문에 우연히 가게 된 것이다.
“전주에는 구경하실 곳이 많습니다.”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고 써붙인 거대한 대문 밑을 통과하면서 기획실장 윤근수가 말했다.
차는 넓게 뚫린 도로를 달려 시내로 진입하는 중이다.
“전주는 천년 고도이기도 하지만 음식맛이 한국 아니, 세계 제일이지요.
같은 가격으로 이만큼 내놓는 식탁은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윤근수의 고향은 서울이다.
그러나 윤근수는 입에서 거품이 일어날 정도로 전주 자랑에 열을 올렸다.
전주에 온 목적은 서비스공장 증설 기념식 때문이었지만 핑계 삼아 며칠 쉬려는 것이었다.
외국에 나가느니 전주에 내려가 쉬라고 최갑중이 충고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출장에는 갑중도 동행했다. 갑중은 두어번 전주에 들른 적이 있다.
그때 갑중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5달러짜리 식탁에 반찬이 스무가지가 넘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지.”
“그것이 다 맛있다니까요. 겉치레로 내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여튼 그 가격으로 어떻게 그런 상을 차리는지 모르겠어.”
“불가사의지요.”
둘이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차는 회사에 도착했다.
이미 회사에서는 준비를 다 갖추고 본사 사장 조철봉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참이어서
식은 곧 진행되었다.
조철봉의 오성자동차서비스 전주공장은 임직원 60명에서 시작된 지 5년만에 7백여명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매출액은 20배가 넘는다.
식을 마친 조철봉이 임직원과 간단한 회의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12시반쯤이었다.
조철봉이 피곤하다고 했기 때문에 윤근수는 다른 일정은 다 취소시켰다.
다만 저녁에 간부진과의 회식 하나만 남겨두고 조철봉을 쉬도록 만들었다.
숙소는 한옥마을 근처에 위치해 있었는데 아늑하고 조용했다.
“그럼 저녁 7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눈치 빠른 윤근수가 방문 앞에서 절을 하고 물러섰지만 갑중은 조철봉의 방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뭐 하실 겁니까?”
하고 갑중이 불쑥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창가로 다가가며 말했다.
“혼자 돌아다니다 올 테다.”
창문을 연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공기도 맑구나.”
창밖으로 전주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아늑했지만 활기를 띤 분위기였다.
생동감이 있으면서도 평온하다.
그림에서 본 유럽의 도시 같기도 하고 갑자기 몇백년 전의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전통과 현대가 섞여진 때문일 것이다.
“이곳을 고향으로 가진 인간들은 좋겠다.”
창밖을 향하고 선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예전 그대로 다 남아 있는 것 같으니까 말야.”
“그럴라고요.”
하면서 옆에 선 갑중도 긴 숨을 뱉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거죠.”
(1536) 언제나 꿈을 꾼다-2
가한옥마을 중심부에 선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이 시내 중심지라고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는 온통 한옥이었다.
오가는 행인들에게 한복을 입힌다면 수백년 전의 시대로 착각할 것 같았다.
다시 발을 뗀 조철봉이 지나면서 열린 한옥 대문 안을 기웃거렸다.
겨울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오후였다. 아늑하다.
그리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외국 도시를 여행할 때는 결코 이런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신비하지만 불안하다.
감탄을 하지만 불편하다.
낯선 곳에서의 호기심은 쉽게 지친다.
조철봉은 한옥마을을 걸으면서 처음으로 관광의 감동이 느껴졌다.
안전한 환경에서 편안하게 전통과 역사를 보는 것이다.
그때 옆을 지나던 여자가 멈춰서더니 길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팸플릿 같았다.
여자가 잠깐 허리를 숙였을 때 엉덩이 바로 위쪽의 맨살이 드러났는데 튀어나온 허리뼈까지 보였다.
피부는 가무잡잡했지만 매끄러웠다.
그 1초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조철봉의 머릿속에는 그 장면이 선명하게 입력되었다.
여자가 다시 발을 떼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허전해졌다.
한옥마을을 다 벗어난 지점이었다.
“저기요.”
주위엔 행인이 뜸했으므로 조철봉이 여자를 불렀다.
서너 발짝 앞서 걷던 여자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보통 이런 경우를 경험으로 봤을 때 열에 아홉은 그저 그랬다.
비행기나 열차, 고속버스 등 배정된 좌석에 앉을 경우에도 마찬가지.
남자들이 그리던 여자의 옆에 앉게 되는 확률은 1할도 안 되는 것이다.
하물며 앞에 선 여자를 불렀을 경우야 오죽하겠는가?
그 이하일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틀렸다.
눈을 크게 뜨고 조철봉을 바라보며 선 이 여자를 보라.
길거리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것을 보면 전주 시민일 것이었다.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깨끗한 거리를 보이고 싶은 애향심이 대단하다.
여자의 맑은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주춤대며 먼저 침부터 삼켰다.
그러나 이 느낌을 받고 머뭇거린 시간은 2초도 안 되었다.
“저기, 제가 전주는 초행이라서 그러는데.”
조철봉이 운을 떼었다.
“점심을 먹을 식당 하나만 소개해 주실랍니까?”
그러자 여자가 빙긋 웃었다.
긴 머리는 뒤에서 묶었기 때문에 이마가 환하게 드러났다.
깨끗한 피부, 맑고 서늘한 눈, 콧날은 반듯했고 입술은 야무졌다.
“뭘 좋아하시는데요?”
여자가 밝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은 기쁨으로 뛰었다.
“예, 저는 아무것이나 다 잘.”
“그럼 백반 드실래요? 싸고 맛있는데.”
“예, 고맙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여자가 발을 떼었고 조철봉은 서둘러 옆을 따랐다.
“참 친절하십니다.”
조철봉이 수작을 계속했다.
“물론 저한테만 이러시는 것이 아닌 줄 잘 압니다.”
“잘 아시네요.”
여자는 진 재킷에다 바지 차림이었고 운동화를 신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이것은 조철봉의 추측이다.
여자 나이는 남자 귀신도 맞히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현대판 남자 귀신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전 조철봉이라고 합니다. 머리도 식힐 겸 전주로 관광을 왔지요.”
다른 때는 이름부터 거짓말을 했는데 오늘은 다르다.
아무래도 공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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