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 새 인연(14)
(1532) 새 인연-27
별장 안으로 들어선 조철봉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강하영을 보았다.
하영은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곳까지 끌려 오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별장은 민가와도 5백미터 가량이나 떨어진 외딴 집이었고 아래채에는 경비원들이 있다.
악을 쓰고 반항을 해봐야 저만 손해라는 것을 깨달을 시간도 되었다.
그렇게 사연이 길었어도 저녁 8시반밖에 되지 않았다.
점심 때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거 서로 등을 때리려다가 덜미를 잡히는구먼.”
앞쪽 자리에 앉은 조철봉이 말했지만 하영은 외면한 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영은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이었지만 진주색 블라우스는 단추가 두개나 떨어졌고
소매는 깃이 뜯어졌다.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이 하영이 긴장을 하려는 표시처럼 보였으므로 조철봉은 가만히 숨을 뱉었다.
“하지만 난 악의가 아니었어. 당신한테 접근하려는 수단으로 사기를 쳤는데 당신은 아니더군.”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린 조철봉이 하영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시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인지 눈 밑에 그늘이 졌고 조금 늘어진 주름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도 매력에는 지장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조철봉은 자신이 점점 하영의 매력에 끌려 들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악질이야. 무자비하고, 여유가 없는 독사야.”
불쑥 말을 뱉었다가 하영의 별명이 살무사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 단어가 머릿속에 박혀있다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철봉은 계속했다.
“날 사기꾼으로 파악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선배로서 충고 한마디 하지.
앞으로 일할 때는 조금 더 앞뒤를 파악해.
더 정보를 모으고 더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란 말야.
진짜 사기를 치려면 말야.”
“… ….”
“절박한 상황에서 사기를 치면 백전백패야.
앞뒤로 여유를 두고 시작하라구.
그리고 다 가져오면 안돼. 죽이면 안된단 말야.”
“… ….”
“또 하나. 네 몸을 밑천으로 사기 치지마.
어설픈 놈들은 넘어갈지 모르지만 전문가 한테는 안통해.”
“… ….”
“그놈의 회사, 상담소하고 룸살롱이 흑자라구?
채무가 하나도 없다구? 사채업자한테 2억2천을 빌렸고 아파트 이중 담보를 잡힌 상태 아냐?
더구나 불쌍한 전 남편을 앞세워 잘 해먹었더구먼.
그 작자는 별만 여러개 붙이고는 이혼당했고.”
그때 하영이 번쩍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쏘아보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입술 끝이 발발 떨렸다.
그러나 곧 시선을 떨구더니 가만 있었다.
조철봉의 목소리가 다시 넓은 응접실을 울렸다.
“그 전 사채업자한테서 빌린 채무는 오늘 나한테 쓴 방법으로 해결한 건가?”
“… ….”
“설마 죽이지는 않았겠지?”
“… ….”
“나도 파란이 많은 인생을 살았고 사기도 좀 쳤지만 너처럼 지저분한 사기꾼은 첨이야.
그래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신기해서.”
그때 하영이 다시 머리를 들더니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순간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하영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맑은 웃음이다.
천진하게까지 보인다.
그때 하영이 말했다.
“하지만 날 갖고 싶지? 그렇지?”
(1533) 새인연-28
아름답다.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있는 강하영의 알몸을 본 순간 조철봉의 머릿속에 먼저 그 단어가 떠올랐다.
이어서 곧 답답해졌다.
자신이 떠올린 그 단어가 왠지 미흡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마음먹은 것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산다.
말보다 글이 더 자세하고 차분하게 묘사되는 장점이 있다지만 그것도 부족하다.
저 혼자서 느낀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 느낌을 전하는 수단이 부족한 것이다.
하영은 천장을 올려다본 채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 아랫배만 오르락내리락할 뿐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몸이다.
방에 불을 환하게 켜 놓아서 하영의 몸은 다 드러났다.
조철봉이 ‘그만 자자’ 한마디 했을 때 하영은 옷을 벗어 던지고는 이렇게 누워버린 것이다.
마치 10년쯤 같이 산 마누라가 하는 행동 같았고 어찌 보면 돈 주고 들어온 아가씨방 같기도 했다.
오히려 조철봉이 어색해져서 아직 파자마 차림으로 엉거주춤 옆에 앉아 있는 중이다.
그러나 조철봉의 가슴은 거칠게 뛰었다.
이런 여자는 첨이다.
사기꾼. 박경택은 하영이 진심이 없으며 아주 간단히 배신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의리나 신의 따위는 엿 바꿔 먹는 성격이라고도 했다.
최갑중이 이 꼴을 보았다면 아마 끼리끼리 통하기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때 하영이 천장을 향한 채로 말했다.
“안해?”
놀란 조철봉이 파자마를 벗어 던지고 금방 알몸이 되어서는 무릎으로 걸어
전등 스위치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놔둬.”
하영이 내쏘듯이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손을 내렸다.
그러자 은근하게 부아가 치밀어 올라왔다.
“야, 몸이나 가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었지만 하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조철봉도 알몸이 되어 하영을 내려다보았다.
하영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자세였으니
침실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일 것이었다.
“네 몸은 참 좋다.”
마침내 조철봉이 속을 털어놓았다.
“마르지도, 살찌지도 않았고 단단하면서 부드럽구나. 탄력도 있고.”
“흥.”
배를 들썩여 코웃음을 친 하영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뭐야? 밤새도록 그렇게 중얼거리고만 있을 거야? 왜? 안 서?”
하면서 힐끗 시선을 내렸다가 얼른 돌렸다.
그러나 한마디는 했다.
“섰구만.”
“난 너 같은 여자 첨이야.”
“나도 그래. 너 같은 사기꾼 첨이야.”
대뜸 하영이 말을 받았으므로 조철봉이 경황 중에도 풀썩 웃었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잘 하니 그래? 넌 타고난 것 같다.”
그러자 하영은 천장에 시선을 준 채로 가만 있었다.
사기꾼이나 도둑놈한테 타고났다는 말은 가장 큰 욕이다.
그 말만큼 상처를 주는 말도 없었다.
조철봉은 당해 봐서 안다.
조철봉의 시선이 하영의 알몸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시 한바탕 훑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갑자기 하영을 안고 울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으므로
조철봉은 어금니를 물었다.
왜 이럴까?
이 사기꾼한테. 냉정하게 따지면 이보다 더 나은 몸매나 미모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영이 도무지 마음을 주지 않기 때문에 더 끌리는 것은 아니다.
마치 혈육 같은 정이 느껴지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이 느낌은 무언가?
그때 하영이 말했다.
“안할 거야?”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472. 언제나 꿈을 꾼다(1) (0) | 2014.09.08 |
---|---|
471. 새 인연(15) (0) | 2014.09.08 |
469. 새 인연(13) (0) | 2014.09.08 |
468. 새 인연(12) (0) | 2014.09.08 |
467. 새 인연(11) (0) | 2014.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