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 도망자(2)
(1485) 도망자-3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나온 조철봉이 안기준을 향해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조철봉의 뒤에 선 비서실장과 여비서까지 따라서 절을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을 때 안기준은 어금니를 물었다.
그러나 안에 탄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었으므로 숨도 뱉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 로비에서 멈추자 안기준은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에게 휩쓸려 나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몸을 움직였을 때 가슴주머니에 넣은 봉투가 사각거렸다.
360만원이 든 봉투였다.
그러나 안기준에게는 그 사각대는 소리가 칼날끼리 부딪치는 것처럼 들렸다.
안기준은 발을 떼었다.
눈 앞에 비상계단 표시가 보였으므로 계단을 올랐다.
2층, 3층, 4층, 7층에서 멈춰선 안기준은 호흡을 고르면서 유리창 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초겨울의 한낮이었다.
햇살이 환했고 대기는 맑았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지만 이쪽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던 안기준은 문득 여기서 떨어지면 죽지는 않고
병신이나 될 가능성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저절로 다시 발이 떼어졌다.
8층, 9층, 10층, 그러다가 발을 멈춘 곳은 16층이다.
가쁜 숨을 뱉으면서 아래를 내려다본 안기준은 여기서 떨어지면
누가 죽었는지도 모를 만큼 박살이 나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기소중지자가 되어 있어서 불심검문에 걸리면 바로 구속이 된다.
그래서 주민증을 갖고 다니지 않는 것이다.
죽으면 누가 죽었는지는 알아야 될 것 아닌가?
한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던 안기준은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가슴주머니에 든 360만원으로 석달은 살 것이다.
아니, 그냥 산다면 1년도 살 수가 있다.
아니, 목숨만 지탱한다면 앞으로 10년, 20년도 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안기준이 대림동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5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어, 나 다녀왔다.”
안으로 들어선 안기준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무실은 오피스텔 겸용이어서 화장실도 있었지만 5평형 면적으로 좁았다.
책상 하나와 의자 두개, 구석의 접이식 침대 하나에다 소형 냉장고, TV 하나가 세간의 전부였다.
침대 옆의 선반으로 다가간 안기준이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360만원 벌었다.
후배한테 갔더니 침대를 산 셈치고 리베이트를 주겠다고 하더란 말야.
그래서 그걸 받아온 거야.”
침대 끝에 앉은 안기준이 선반 위에 놓인 검정 화장품 케이스를 보았다.
케이스 안에는 2년 전에 죽은 딸의 유골이 들어있는 것이다.
부도가 난 날 밤에 집에서 짐을 꾸려 도망나오면서 함께 가져온 것이다.
물론 마누라는 이 케이스에 딸의 유골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화장시키고 나서 유골을 갖고 도망쳤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와
서재의 책꽂이 옆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누라는 2년 동안 그것을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그걸 받고 나서 갑자기 의욕이 없어지더구나. 살 의욕이 말야.”
안기준이 케이스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죽을 작정을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돌아왔다.”
그러고는 안기준이 갑자기 한쪽 귀를 케이스 쪽으로 돌렸다.
“응? 뭐라고?”
안기준이 곧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잘 했다고? 그래?”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안기준은 긴 숨을 뱉었다.
“글쎄, 정말 그럴까? 나한테 기회가 있을까?”
다시 안기준이 귀를 기울였다.
(1486) 도망자-4
그날 밤,
안기준은 청담동의 국일아파트 안 놀이터에 와 있었다.
밤 10시여서 놀이터는 텅 비었다.
그러나 아파트의 불빛은 환했고 자잘한 소음이 놀이터까지 들려왔다.
소음 중에서 아이들의 소음은 가장 두드러졌다.
가만 들으면 웃는 소리, 부르는 소리, 우는 소리까지 선명했다.
안기준은 놀이터 끝의 나무 벤치에 앉아 103동 703호를 올려다 보았다.
7층의 오른쪽 세번째 아파트였다.
거실과 응접실의 불은 다 켜졌지만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다른 곳은 사람 그림자가 오갔는데 703호는 조용한 것이다.
성규는 13살로 중학교 1년, 민규는 10살로 초등학교 3학년이다.
한동안 아파트를 올려다 보던 안기준은 마침내 벤치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은 집을 나온 지 열흘쯤 되었을 때 버려야만 했다.
자꾸 경찰에서 찾는 바람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놀이터 옆의 공중전화 박스로 다가간 안기준은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마누라 김수정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 것이다.
신호가 세번 울리고 나서야 김수정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안기준이 낮게 말했을 때 김수정은 3초쯤 가만 있다가 대답했다.
“응, 왜?”
“나, 지금 집 앞 놀이터에 와 있는데.”
“… ….”
“당신이 애들 데리고 나오기 그러면 애들만 잠깐 보내주지 않을래?”
“추워, 애들 감기 들어.”
“10분이면 돼.”
“… ….”
“내가 자주 이러지는 않을 테니까.”
“웬 청승이야? 갑자기.”
낮지만 차갑게 말한 김수정이 또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이러지마.”
“알았어.”
“언제는 헤어지자고 처자식 모른 척하더니 지금 와서 왜이래?”
“미안해.”
“딱 10분이야.”
“고마워.”
그러더니 철컥 전화가 끊겼으므로 안기준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당연한 업보다. 동화산업이 잘 나갈 때 아이들 얼굴은 한달에 한 두번 볼까 말까 했다.
아이들이 잘 때 들어갔다가 나오거나 외박을 밥 먹듯이 했기 때문이다.
김수정이 불평하면 이혼하자면서 몰아붙였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지금 성격 차이가 어떻고 자시고 할 상황인가?
다 망해서 처자식 거지 만들어놓고 도망다니는 신세인 것이다.
이 아파트도 은행 담보로 넣어져 있어서 김수정은 다음달에 비워줘야 한다.
공중전화 박스를 나온 안기준이 놀이터 그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다가오는 두 그림자를 보았다.
성규와 민규다.
둘은 몸을 딱 붙인 채 조심조심 다가왔는데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5미터쯤의 거리가 되었을 때 민규가 달려왔다.
“아빠.”
“오냐.”
왈칵 눈물이 쏟아졌으므로 안기준은 이를 악물고 두 팔을 벌려 민규를 안았다.
어두웠지만 눈물이 보일까봐 외면한 채 안았다.
“아빠, 여기서 기다렸어?”
하고 민규가 물었을 때 성규가 다가와 섰다.
성규가 빤히 안기준을 올려다 보았다.
굳어진 표정이다.
“아빠, 춥지?”
이번에는 성규가 그렇게 물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힐끗 보았지만 돈 같다. 지폐가 여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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