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445. 도망자(1)

오늘의 쉼터 2014. 9. 5. 22:53

445. 도망자(1)

 

 

(1483) 도망자-1  

 

 최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날 만나려는 목적이 무엇일 것 같으냐?”

“그야.”

해놓고는 갑중이 얼른 생각나지 않는듯이 눈을 껌벅였다.

 

그러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지금 안 사장 입장으로는 취직 부탁을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도망자 신세거든요.”

“얼마나 걸린 거야?”

“당좌가 25억, 약속어음도 그 정도쯤 된다고 들었습니다.”

“큰데.”

“회복 불능이죠.”

이건 자신 있게 말한 갑중이 힐끗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15분, 안기준과 약속한 건 2시반이었다.

 

안기준은 조철봉의 고교 선배로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동화산업의 사장이었지만

 

석달 전에 부도를 냈다.

 

꽤 큰 사업체여서 경제지에도 크게 실렸는데 부도 원인은 해외 사업의 부진과 방만한 경영이었다.

 

조철봉과는 소량의 부품을 거래해온 관계여서 걸린 것이 없다.

 

조철봉이 다시 갑중을 보았다.

“혹시 그 양반이 돈 이야기를 하려고 만나자는 것 아닐까”

“글쎄요.”

갑중이 머리를 기울였다.

 

안기준은 갑중에게도 선배가 되는 것이다.

 

어깨를 들었다가 내린 갑중이 말을 이었다.

“그 양반 완전히 거지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꼬불쳐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

“채권자들이 파헤쳤다가 다 두 손 들고 떨어져 나갔다니까요.”

“그 양반이 좀 고집이 세. 자존심이 강하고 말이야. 잘난 척도 되게 하더니.”

“결론적으로 멍청한 거죠.”

“그렇지.”

“형님은 지금 부도 나도 한 5백억은 챙기실 수 있죠?

“이 시키가.”

했다가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한동안 속셈을 하는 것 같더니 말했다.

“외국 부동산까지 합하면 8백억은 될 거다.”

“그만하면 갑부죠.”

“인마, 나보다 더 많은 놈 많아. 그리고….”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재산 도피하려고 그런 게 아니란 걸 너도 잘 알잖아?”

“그러니까 안 사장이 멍청하다는 거죠.”

그러더니 갑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기실에 와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쨌든 만나 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다시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벽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2시반부터 만나니까 10분쯤 지났을 때 급한 손님이 있다면서 날 불러내,

 

알았지? 그렇지, 박 실장을 시키는 게 낫겠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갑중이 조철봉을 향해 몸을 돌렸다.

“봉투는 하나 준비해 놓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음, 그래야겠군.”

“얼마를 넣을까요?”

“백만원쯤이 어떨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 사장인데.”

“그럼 이백을 넣어라.”

“제가 백 보탤 테니까 삼백 넣어서 박 실장한테 들려 보내지요.”

“이 시키가.”

눈을 치켜뜬 조철봉이 갑중을 흘겼다.

“무조건 많이 준다고 좋은 거 아녀, 이 시키야. 그것도 자존심 문제란 말이다.”

그러나 갑중은 들은 척도 안 했다. 

 

 

 

(1484) 도망자-2 

 

 “어서오십시오.”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안기준을 맞았다.

 

처음에는 너무 활짝 웃었다가 스스로 생각해도 과장된 것 같아서 얼른 표정을 고쳤다.

 

안기준은 잠자코 조철봉이 내민 손을 잡았다.

 

깔끔한 양복 차림에다 얼굴도 잘 다듬었지만 조철봉의 눈에는 궁기가 배어났다.

 

선입견 때문이다.

 

조철봉도 그 선입견의 피해를 여러번 보았으면서도 저 역시 상대방을 그렇게 대한다.

 

부도가 나서 거지가 된 인간은 제 아무리 깔끔해도 궁기가 나는 것이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 잘못된 선입견은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조철봉은 안기준이 의외로 차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수도 오히려 적어진데다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기가 꺾인 표정이 아니다.

 

전에는 말이 좀 많았다.

 

떠들썩한데다 몸짓이 커서 과장된 자세였고

 

그것이 자신감 부족으로까지 보일 때도 있었다.

 

몇초쯤 정적이 덮여졌을 때 그것을 깬 것은 조철봉이다.

 

조철봉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선배님 소식은 들었는데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찾다니.”

쓴웃음을 지은 안기준이 말을 이었다.

“내가 요즘도 도망 다니는데 뭘.”

“아아.”

할말을 잃은 조철봉이 시선을 돌렸을 때 안기준이 탁자 위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시선을 든 조철봉은 그것이 카탈로그인 것을 보았다.

 

돌침대 카탈로그였다.

“이거.”

멋쩍은 웃음을 띤 안기준이 손끝으로 카탈로그를 짚었다.

“내가 요즘 돌침대 세일즈를 해. 그래서 생활비를 만들려고.”

“…….”

“황토 바닥에다 수정하고 자석까지 깔려 있어서 만병통치라는 거야.”

그때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안기준은 ‘만병통치야’하지 않고 ‘만병통치라는 거야’했기 때문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안기준이 다시 멋쩍게 웃었다.

“그래 효능이 그렇다고는 써있지만 내가 보증은 못하겠네.”

안기준은 조철봉의 시선에 담긴 뜻을 읽은 것이다.

 

조철봉도 소리 죽여 숨을 뱉었다.

 

3년 선배인 안기준은 올해로 마흔넷이다.

 

고교 선배 중에서도 잘나가는 축에 끼었던 안기준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어서

 

효능도 불확실한 돌침대를 팔려고 나타났다.

 

제조원도 처음보는 회사였다.

“어이구.”

가격을 본 조철봉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가장 싼 2인용이 6백만원,

 

디럭스형은 1천2백만원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때 안기준이 말했다.

“부모님한테 효도 선물로 권하라고 하지만 요즘은 어디.”

입맛을 다신 안기준이 시선을 돌렸다.

“노인들은 돈 봉투 선물을 제일 좋아한다고 하더구만.”

“선배님, 이거 팔면 얼마 남으세요?”

불쑥 조철봉이 묻자 안기준이 머리를 들었다.

 

지친 표정이었다.

 

얼굴의 생기는 다 흩어지고 나이보다 다섯살쯤 더 늙어 보였다.

 

안기준이 입술만 달싹이며 말했다.

“30프로 남아. 마진이 많은 편이지.”

“그럼.”

“조철봉이 제일 비싼 디럭스형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거 팔면 3백6십이 남는군요.’

“그런 셈이지.”

“그럼 제가 이 디럭스형을 산 셈 치고 선배님한테 3백6십을 드리면 안될까요?

 

 왜냐하면 어머니가 돌침대는 싫어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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