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 이래도 한세상(7)
(1478) 이래도 한세상-13
김종인은 언젠가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유서를 쓴 일본인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읽은 다음 순간에는 도대체 이런 정신력이 있단 말인가?
하고 감동을 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 내가 그 입장이 되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기사를 본 사람이면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김종인은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의 섹스를 떠올렸다.
김종인은 스스로도 용감한 성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지도 강하지 못하다. 뒤끝도 없고 부끄럼을 타는 바람에 나서서 하는 일은 질색을 했다.
비행기가 떨어지는데 내가 뭘 한단 말인가?
주위에서는 아우성을 치면서 난리 법석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울어? 안 울 것이다. 믿지도 않았던 주님, 부처님을 찾아?
정신이 없다고 해도 그렇게는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뭔가?
움직이기는 해야 될 것 같은데 유서가 써질까?
볼펜하고 종이 찾다가 시간 다 가겠다.
그럼 남은 건 섹스다. 평소에 늘 공상을 해 오지 않았는가?
혹시 비슷한 심사의 여자가 주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비겁한 방법일까?
그렇다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퍼 마시면서 떨어져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결국 김종인은 그때 섹스로 결론을 내었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자 엄청 자극적이었다.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의 섹스. 열이 난 김종인은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공장 창고로 들어가
그 순간을 상상하며 자위를 했다.
김종인처럼 취미가 없는 인간에게 섹스에 대한 상상은 거의 유일한 낙인 것이다.
깜박 잠이 들었던 김종인이 깨어났을 때는 밤 12시 반이었다.
집 안은 조용했고 옆자리는 비어 있었으므로 김종인은 한동안 천장을 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와 냉장고 문을 열려다 현주의 방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으므로 움직임을 멈췄다.
배미옥이다.
현주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
차분한 목소리로 배미옥이 말했다.
“어린애같이 놀지 말란 말이야. 내 말 잘 들어.”
그러고는 배미옥이 목소리를 낮췄으므로 김종인은 한 걸음 문 쪽으로 다가가 섰다.
그때 배미옥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갑작스럽겠지만 하는 수 없어.
난 애들 아빠하고 중국으로 갈 거야.
그리고 우린 이제 끝난 거야.
두 번 다시 볼 일도 없을 거라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눈을 치켜뜬 김종인이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을 때 배미옥이 말했다.
“거기도 이제 나 잊도록 해.
우리 사이는 불장난이었어.
그래, 난 요즘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아.”
김종인은 가슴이 튀어나올 것처럼 벌떡거렸으므로 손바닥으로 가슴을 눌렀다.
그럼 방 안에 현주가 없단 말인가?
배미옥은 지금 전화를 하고 있단 말인가?
전화를 받는 남자하고 불장난을 했다는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진 김종인의 귀에 배미옥의 목소리가 울렸다.
“글쎄,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어.
끝나면 끝나는 거지 무슨 이유가 있어?
그리고 그 이유를 댄다고 해도 이미 내가 정리를 한 이상 거긴 수습하지 못해.”
그러더니 배미옥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이제 끝난 거야. 더 이상 전화 걸지 말고 잘 지내.
거긴 착한 사람이니까 잘 살 거야. 좋은 여자도 만날 것이고. 안녕.”
안녕 소리를 들으면서 김종인은 발끝으로 뛰어 방으로 들어섰다.
세 발짝을 뛰었는데도 숨이 찼고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시트를 들추고 누워 심호흡을 했을 때 배미옥이 방으로 들어왔다.
(1479) 이래도 한세상-14
다음날 오전 김종인은 항공하물로 짐을 부치고 나서 거리의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섰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바람에 공중전화 박스가 줄어든데다 항상 비어 있다.
김종인은 중국에서 오는 바람에 핸드폰이 없다.
“여보세요.”
신호음이 두번 울리고 나서 곧 김종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종인의 동생 김종석이다.
“예, 호적과 김종석입니다.”
“응, 나다.”
“예? 누구시라고요?”
“나야, 형이다.”
“아, 형.”
김종석의 목소리가 처졌다.
“형, 중국 안 갔어요?”
“내일 가려고.”
“아.”
그러고는 김종석이 가만있었다.
이놈과는 여섯살 차이가 났는데 가운데 낀 동생 하나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이다.
형제간이 뚝뚝한 건 비슷해서 둘이 전화기를 귀에 붙이고 3초쯤 가만있었다.
그러다가 먼저 김종인이 입을 열었다.
“거시기, 너.”
“예.”
“부모님 산소 말인데.”
“예.”
“좀 자주 가서 봐줬으면 해서”
“… ….”
“물론 내가 장남이라 당연히 해야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저도 일년에 두번은 꼭 가요.”
“그래서 고맙게 생각한다.”
김종인은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김종석은 지방대학이었지만 졸업을 했다.
그때 김종인은 단추 공장을 하면서 꼬박꼬박 하숙비와 용돈, 등록금을 대었다.
김종석이 결혼할 때도 결혼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아파트 전세금도 내주었다.
그것뿐인가?
공장이 제법 잘될 때는 일년에 열두번씩 돈을 타갔다.
배미옥이 언젠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는데 김종석한테 들어간 돈이 3억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종석은 김종인이 어렵게 되었을 때 만원도 도와주지 않았다.
김종인이 아쉬운 소리를 할까봐서인지 한동안은 연락도 끊었다.
그러나 김종인은 한때 쌀을 사지 못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김종석에게 한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어쨌든 말이지.”
김종인이 겨우 말을 이었다.
전화를 한 목적은 부모 산소 잘 봐달라는 용건도 있지만 동생 김종석에게
사실을 밝히고 뒤처리를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종석의 감정이 둔한데다 사이까지 서먹서먹해진 터라
오히려 그런 말 해버리기가 쉽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까
의욕이 사라졌다.
“뭔데요?”
김종석이 묻자 김종인이 머리를 들고 거리를 보았다.
사람과 차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6개월 후면 움직이지 못하고 죽는다니.
“잘 지내거라.”
심호흡을 한 김종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좀 못난 형이지만 너한테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 ….”
“서운한 점 있으면 용서하거라.
너도 잘 알겠지만 내가 나쁜 인간은 아니잖니.”
“누가 뭐라고 했어요?”
“애들 잘되기 바라고, 그리고.”
“아니, 형.”
김종석이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김종인은 서둘러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야기를 해서 무얼 한단 말인가?
다 부질없다.
어차피 혼자서 가는 인생이다.
김종인은 박스를 나왔다.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444. 이래도 한세상(9) (0) | 2014.09.05 |
---|---|
443. 이래도 한세상(8) (0) | 2014.09.05 |
441. 이래도 한세상(6) (0) | 2014.09.05 |
440. 이래도 한세상(5) (0) | 2014.09.05 |
439. 이래도 한세상(4) (0) | 2014.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