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440. 이래도 한세상(5)

오늘의 쉼터 2014. 9. 5. 22:46

440. 이래도 한세상(5)

 

 

(1474) 이래도 한세상-9 

 

 

 

 

 김종인은 소주를 한 모금에 삼키고는 배미옥이 싸준 쌈을 다시 입을 벌려 받았다.

 

배미옥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암이 그렇게 번지도록 몰랐단 말야? 참 답답한 사람이야, 당신은.”

“그냥 소화가 잘 안되는 줄 알았지. 지금도 실감이 안 나.”

씹던 것을 삼킨 김종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내가 6개월밖에 못 산다니 아무래도 날 갖고 장난하는 것 같아.

 

당신하고 박원장, 그리고 내과 과장까지 짜고.”

“그럼 얼마나 좋아?”

그러더니 배미옥이 이번에는 제 잔에 소주를 채우고는 단숨에 삼켰다.

“당신, 그래도 중국 갈 거지?”

다시 배미옥이 물었으므로 김종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수술은 못한대. 너무 번져서.”

“알아. 다 잘라내면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도 하더구먼.”

“두어달 후부터 아프고 마른다던데.”

“할 수 없지.”

“참, 당신도.”

다시 제 잔에 술을 채우면서 배미옥이 말했다.

 

말하면서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남의 일 말하는 것 같아.”

“할 수 없잖아? 길길이 뛴다고 해서 내 대장이 딴 데로 갈 것도 아니고.”

“당신은 참 별난 사람이야.”

“별나긴, 단추공장 사장이지.”

“내가 따라갈게.”

불쑥 말한 배미옥이 머리를 들고 김종인을 보았다.

“내가 중국 따라간다고.”

“현주는 어떻게 하고?”

“저년은 지 애인만 있으면 돼.”

식탁의 빈 자리를 흘겨본 배미옥이 김종인과 제 잔에 소주를 채웠다.

“내가 당신 옆에 있을게.”

“육개월 동안?”

“육개월인지 육년인지.”

그러더니 배미옥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리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아까 박원장한테서 그 말을 듣고 어쩐지 내 예감이 맞는 것 같았어.

 

당신이 소화제를 사오라고 했을 때 갑자기 병원에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도 그랬어.”

한 모금 소주를 삼킨 김종인이 이제 술기운이 번진 얼굴로 배미옥을 보았다.

“갑자기 부모님 산소에 오고 싶었던 것도 그랬어.

 

아주 조바심이 날 정도로 오고 싶더라니까.”

“…….”

“산소에서 부모님한테 혼잣말을 하면서 앉아 있는데

 

엉덩이가 땅바닥에 딱 들어붙는 느낌이 들더라니까? 참 편안했어.”

“…….”

“아까 당신하고 박내과 앞에서 헤어질 때 갑자기 가슴이 차분해지더라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고. 그때도 기분이 묘하더구먼.”

“…….”

 

“그런데 말야.”

정색한 김종인이 배미옥을 보았다.

“당신은 여기 있어. 내가 때가 되면 돌아올 테니까.

 

당신 애 먹는 거 보고 싶지 않아.”

그러자 이번에는 배미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다 죽는 거야, 인간은. 그지?”

“그야.”

“우리 6개월을 16년, 아니 60년처럼 같이 살다가 죽자.”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김종인을 보았다.

“당신이 좋아하는 거 다 해줄게.” 

 

 

 

(1475) 이래도 한세상-10 

 

 

 

 

 “아니, 엄마가 왜?”

배미옥이 김종인과 함께 중국으로 가겠다고 하자 현주가 대뜸 물었다.

 

다음 날 아침 모처럼 셋이 같이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현주는 오늘 오후 근무라서 같이 아침을 먹은 것이다.

“엄마는 중국 안 간다고 했잖아?”

“가야겠다.”

자잘한 성품이 아닌 배미옥이 그렇게만 말하더니 현주를 쏘아보았다.

“네 월급 갖고 혼자 살 수 있지?”

“그럼 엄마한테 적금 붓는 것 안 내도 되는 거야?”

“대신 아파트 관리비를 내.”

“얼만데?”

“25만원쯤 될 거다.”

“그럼 됐어.”

기분이 풀린 현주가 머리를 끄덕였다.

 

현주는 매월 제 월급에서 적금으로 50만원씩 떼고 나머지를 용돈으로 썼다.

 

이제 적금 대신 관리비만 내라니 용돈이 25만원 늘어난 셈이 될 것이다.

 

현주가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으므로 김종인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현주는 제 셈만 하고 나서 어머니가 왜 가는지도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자식 다 필요 없다니까.”

식탁에 그대로 앉은 채 배미옥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나도 그랬지. 시집가면 친정 식구는 남처럼 대한 벌을 받는 거지.”

“차라리 정 떼는 게 나아.”

시선을 식탁에 준 채로 김종인이 말을 이었다.

“매달리고 아양 떠는 애를 놔두고 가려면 가슴이 좀 아프겠지만

 

저렇게 지 애비를 소 닭 보듯 하는 애라 괜찮구먼.”

“날 닮았어.”

그렇게 말한 배미옥이 쓴웃음을 지었다.

“뚝뚝 한 것이. 하지만.”

“하지만 뭐?”

“난 친정아버지를 많이 따랐는데.”

“장인어른은 식구들하고 쭉 같이 계셨으니까,

 

나처럼 단추공장 한다면서 애들 얼굴 볼 시간도 없던 놈하고는 다르지.”

“시골 농사꾼이 다 그렇지, 뭐. 병석이한테 연락을 해, 엄마가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배미옥이 말했다.

“걔도 놀라겠네.”

물론 아들 병석이한테도 김종인이 6개월밖에 못 산다는 이야기는 안 할 작정이었다.

 

가능할 때까지 숨겼다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되면 말하자고 둘이 합의를 본 것이다.

 

김종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주의 방으로 다가가 노크를 했다.

 

배미옥의 짐을 꾸려야 했기 때문에 출발은 며칠 늦췄지만

 

현주하고 이야기할 시간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내일부터 현주는 다시 아침 근무이고 그때는 새벽에 나갔다가 밤 늦게 들어온다.

 

김종인이 방으로 들어서자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던 현주가 물었다.

“왜요?”

현주는 인터넷 쇼핑몰을 보고 있었다.

“너, 애인 있다면서?”

“응, 그런데요?”

 

“아니, 그냥.”

침대 끝에 앉은 김종인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가늘게 숨을 뱉었다.

 

배미옥이 따라간다면 중국에서 죽고 나서 화장을 한 후에 선산의 부모 옆에

 

뼛가루로 묻힐 계획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온전한 상태에서 현주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지금뿐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현주야.”

헛기침을 한 김종인이 불렀을 때,

 

그 사이에 다시 쇼핑몰을 보고 있던 현주가 머리를 들었다.

“왜요.”

얼굴에 짜증기가 배어 나와 있었다.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442. 이래도 한세상(7)  (0) 2014.09.05
441. 이래도 한세상(6)  (0) 2014.09.05
439. 이래도 한세상(4)  (0) 2014.09.05
438. 이래도 한세상(3)  (0) 2014.09.05
437. 이래도 한세상(2)  (0) 2014.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