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 이래도 한세상(6)
(1476) 이래도 한세상-11
김종인은 먼저 헛기침부터 했다.
제 엄마 배미옥을 닮아 뚝뚝한 성품이기도 했지만 김종인은 또 어떤가?
지금까지 애들 학용품 한번 사준 적 없고 데리고 나가 같이 영화구경을 한 적도 없다.
외식 몇번, 그 흔한 바캉스도 마지못해 딱 두번 간 것이 전부였다.
그저 바쁘게만 살았다. 열심히 살았다는 표현도 맞다.
딴 데 한눈 안 팔고 죽어라고 일만 한 것이 다 처자식 위한 것이라며 당당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일이 잘 되고 있을 때는 처자식한테 큰소리 탕탕 치면서
모르고 넘어갔는데 쪼들릴 때 꼭 뒤를 돌아보게 된다.
자신감이 없어지면서 기가 죽는 것이다.
“거시기.”
김종인이 현주의 옆 얼굴에 대고 입을 열었다.
“너야 시집가면 옛말에도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있어서 먼저 시부모하고 남편,
자식부터 챙겨야겠지. 나도 다 이해한다.”
그러자 현주가 갑자기 웬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가?
하는 표정으로 김종인을 보았다.
김종인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지금까지 따뜻한 말 제대로 해준 적이 없고
네가 좋아하는 햄버거도 맘만 먹었지 못사줬다.”
그러자 현주가 풀석 웃었다.
“옛날 얘기 하시네. 난 햄버거 끝낸지 오래됐거덩.”
“어쨌든.”
여전히 정색한 김종인이 현주를 보았다.
“아빠가 여러가지로 미안했다. 하지만 난 너를….”
“아빠.”
현주가 말을 잘랐으므로 김종인이 침을 삼켰다.
목이 메었기도 했다.
김종인의 시선을 받은 현주가 물었다.
“급한 일 아니면 쫌 있다 하면 안될까? 지금 쇼핑 급한 게 있어서 그래.”
“응?”
“여기.”
현주가 눈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구두 세일을 하거든. 나, 급해.”
“응, 그래?”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선 김종인이 배의 통증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통증은 요즘 자주 찾아왔다.
그것이 대장암 때문이었던 것이다.
문으로 다가간 김종인이 다시 머리를 돌려 현주를 보았다.
현주는 이미 컴퓨터에 열중해 있었다.
거실로 나온 김종인은 멍한 표정으로 집안을 둘러보다가 무엇이 생각 난것처럼 화장실로 들어섰다.
문을 안에서 잠근 김종인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휑한 얼굴이 거울에 비쳐졌다.
이것이 대장암 말기의 얼굴, 6개월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의 얼굴이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지만 김종인은 거울을 응시한 채 내버려 두었다.
죽는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미련도 별로 없다.
다만 좀 외로울 뿐이다.
배미옥이 따라 가준다고 해서 위로는 되었지만 왠지 큰 짐을 지게 된 것 같다.
무겁고 부담스럽고 거북하다.
갑자기 쌈을 입안에 넣어주면서 사근사근해진 배미옥이 남 같다.
그러는 동안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고 김종인은 오랜만에 실컷 울었다.
부모님 죽고 처음 이렇게 운다.
세수를 하고 나왔을 때 배미옥이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먼저 이것부터 중국에다 보내야겠어.”
배미옥이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러고 짐 꾸리다 생각났는데 계룡산에 용한 도사님이 있대.
오늘 거기 한번 다녀오자.”
김종인은 배미옥이 도사 찾는 건 처음 듣는다.
(1477) 이래도 한세상-12
그날 밤, 김종인은 배미옥과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아직 10시밖에 되지 않았다.
계룡산 도사를 만나고 온 배미옥이 피곤하다면서 일찍 침대에 들었기 때문이다.
현주는 오후 근무를 나가더니 아예 오늘 밤은 슈퍼마켓 근처의 친구 집에서 자고
내일 출근하겠다고 했다.
불은 꺼 놓았지만 창 밖에서 들어온 반사광으로 방 안의 사물 윤곽은 뚜렷하게 드러났다.
“자?”
하고 배미옥이 물었으므로 김종인은 머리만 조금 그쪽으로 돌렸다.
“아니. 왜?”
“당신 동생한테 말 안 해도 돼?”
“괜찮아.”
김종인의 동생 김종석은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그러나 경상남도 어딘가로 발령을 받고는 명절 때나 보았다가 김종인이
중국으로 떠난 후에는 못 만났다.
그쪽도 성품이 데데해서 문안 전화를 올리고 안부를 묻는 인간이 아니다.
“내가 가기 전에 연락이나 한번 하지, 뭐.”
“어딜 가기 전에?”
“거기.”
해 놓고는 김종인이 몸을 돌려 배미옥을 보았다.
“내가 요즘 어떤 노래 가사가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지 알아?”
“뭔데.”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는 노래?”
“그래.”
둘은 마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천장을 향한 채 김종인이 말을 이었다.
“참 열심히 살았는데.”
“…….”
“돈은 못 벌었고.”
“마누라 복도 없었지. 그지?’
문득 배미옥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으므로 김종인은 머리를 저었다.
“아냐. 당신은 나한테 과분해. 오히려 당신이 남편 복이 없었지.”
“세상은 불공평해.”
천장을 향해 가늘고 긴 숨을 뱉은 배미옥이 말을 이었다.
“사업도 기울어 가는데 당신이 그런 일을 당하다니.”
“내가 어때서?”
배미옥은 대답하지 않았고 김종인의 말이 이어졌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이라니까.”
“…….”
“좀 빨리 갈 뿐이야. 다만.”
김종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죽기 두어 달쯤 전부터 아프다던데, 그걸 견딜 생각을 하니까…….”
“…….”
“현주한테는 이야기하지 마. 내가 죽을 때까지.”
“…….”
“병석이는 중국에 같이 있으니까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꼭 가야만 해? 중국에 말야.”
불쑥 배미옥이 물었으므로 김종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비실거리다가 죽는 거 싫어. 일하다가 갈 거야.”
“하지만.”
“하지만 뭐?”
“병원에 다닐 때 불편할 텐데.”
“병원은 무슨.”
김종인이 헛웃음을 지으면서 제 배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6개월 남은 인생인데, 아니 5개월28일 남았나?”
“날짜 셀 거야?”
“그냥 아침에 눈뜨면 세어지더라고. 어제부터.”
그러자 다시 배미옥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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