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 이래도 한세상(3)
(1470) 이래도 한세상-5
건성이다.
아들 병석이는 말할 것도 없고 마누라 배미옥도 제 조부모, 시부모한테 차례 지내는 꼴을 보면
그저 슈퍼에서 사온 북어, 과일을 벌여 놓고는 술 따르고 절하는 것으로 끝난다.
김종인은 땅이 말라서 뜯어낼 잡초도 없는 봉분의 주위를 서성거리며 뗏장을 손보았다.
배미옥과 병석은 절하고 나더니 곧장 아래쪽 평지로 내려가 오랜만에 모자가 도란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도 보기 나쁜 광경이 아니었지만 김종인은 허전했다.
“아버지, 어머니, 오래 못와서 죄송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제 형편이 좀 안 좋아서요.”
봉분 뒤쪽에 쪼그리고 앉아 한눈으로 모자를 훔쳐보면서 김종인이 묘 안에 누워 계신 부모에게 말했다.
고생만 죽어라고 하다가 가신 양반들이었다.
두 분 모두 광복 전에 태어나 일제 시대에 10대를 보낸 후에 아버지는 6·25때는 국군 하사로
전쟁을 치렀다.
그러다가 밥 굶지 않고 잘살게 되자마자 두 분이 나란히 세상을 뜬 것이다.
“근데요, 아버님.”
마른 잡초를 뜯으면서 김종인이 말을 이었다.
“병석이가 중국 계집애하고 결혼한다는데,
그놈이 그 길이 저도 살고 제 공장도 사는 길이라면서요.”
그러더니 갑자기 격정이 치밀어오른 김종인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제가 다른 재주가 있어야지요.
30년 동안 단추공장만 해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국놈들의 싼 가격에는 당해낼 재주가 없걸랑요.
아주 저희들끼리 짜고서 저를 죽이려고 드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병석이가 그럴 바에는 아예 중국놈 사위가 되어서 단추공장하고
섬유공장을 하나로 묶어서 움직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럼 한국 섬유 오더도 따올 수가 있는 거지요.
그게 누구 생각이냐구요?”
김종인이 제 말에 제가 대답했다.
“그 중국놈, 그러니까 병석이 처가 될 여자의 아버지가 되는 중국놈 섬유회사 사장의 생각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거지요.
그놈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병석이를 데려 가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선을 내린 김종인이 길게 숨을 뱉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사는 제가 살아 있을 때까지밖에 지내지 못하겠네요.
어디 저놈이 여기까지 올 수가 있겠습니까?”
머리를 든 김종인이 아래쪽의 병석을 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다시 중국으로 갑니다.
병석이 에미는 현주하고 여기 남는다는데, 전 여기선 배겨낼 수가 없습니다.
중국에서 일하다가 죽을 겁니다.”
다시 긴 숨을 뱉은 김종인이 마른 봉분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제가 죽으면 화장해서 아버님 어머님 옆에 묻으라고는 할 겁니다.
그때 다시 뵙든지, 여유가 있으면 다시 들르지요.”
그때 마침 병석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김종인을 소리쳐 불렀다.
“아버지! 이젠 가시죠!”
싸가지가 없는 놈이 봉분엔 시선도 주지 않고 제 애비만 불렀으므로 김종인이 눈을 치켜떴다.
“얀마, 다시 올라와! 인사를 드리고 가야 할 것 아냐!”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짓고 병석이 제 에미하고 휘적이며 다가왔다.
“너,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여기 네 조부모하고 합장하거라, 알았지?”
정색하고 김종인이 말하자 병석의 표정도 굳어졌다.
김종인이 배미옥을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네 뿌리는 여기다. 알고나 있어, 이놈아.”
(1471) 이래도 한세상-6
친구 여섯이 모였으므로 식당 안은 떠들썩했다.
김종인의 귀국 축하 명목이었는데 모두 고등학교 동창이다.
따지고 보면 동창 모임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다 있지만
그 중 가장 결속력이 강하고 모임이 많은 것이 고등학교 동창관계일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너무 씨알이 어리거나 굵어지기 전에,
그러니까 타산이 박히기 전에 만들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50대 후반이 된 지금, 꿈 많고 혈기 넘쳤던 젊은 날은 지났고 모두의 얼굴에는
한결 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소리내어 웃는 놈도 마찬가지, 웃고 나면 얼굴에 더 수심이 덮이는 것 같다.
김종인은 대학을 중퇴해서 고등학교 동창이 끝인데 이놈들하고는 같은 서클이었기 때문에
40년이 넘은 관계다.
처음에 25명이었다가 그 중 4명이 죽고, 5명은 이민을 갔으며,
10명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일 때문에 못 나왔는데 급한 소집에 이만큼 모인 것도 대단하다고 했다.
소주를 서너잔씩 마셨을 때 분위기는 떠들썩해졌다.
김종인이 저 빼놓고 다섯을 죽 둘러보았다.
다섯 중 상처를 했거나 이혼 등으로 혼자 사는 놈이 둘이다.
죽은 놈, 이민 가서 연락이 되지 않는 9명을 뺀 16명 중에서 혼자 사는 놈이 5명이나 된다.
삼분의 일이다.
그리고 16명 중에서 직장에 다니는 놈은 절반인 8명,
그 중에 김종인도 끼었지만 8명 중 아파트 경비와 건물 경비원으로 나가는 놈이 3명이다.
나머지는 사업하는 놈이 셋, 회계사 하나, 변호사는 배출 못했고 소아과 의사가 하나 있다.
노는 놈 8명 중 그럭저럭 사는 놈도 있지만 동가식서가숙하면서 말년을 불우하게 보내는 놈도
둘이나 된다.
물론 오늘 그 둘은 안 나왔다.
“그래서….”
입담이 좋은 회계사 이건우가 말을 이었다.
이놈은 앉으나 서나 입만 열면 여자 이야기다.
놔두면 저 혼자서 섹스이야기로 밤을 새운다.
“슬슬 만지다가 팬티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더니 벌써 흐르는 거야.”
놈은 지금 상담을 하러 왔던 아줌마 따먹은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모두 가볍게 듣는 중이었고 이건우가 열을 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래서 슬쩍 어깨를 밀었지. 소파 위로 말이야.”
그때 김종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종수가 낮게 말했다.
“야, 봉규가 이혼한단다.”
놀란 김종인이 어깨를 들고 끝쪽에 앉아있는 서봉규를 보았다.
보험회사 중역으로 명퇴한 서봉규는 재산도 꽤 모았다고 했다.
딸 둘도 모두 출가시키고 부부 동반으로 해외 골프여행을 다닌다던 놈이었다.
유종수가 말을 이었다.
“봉규 마누라가 남자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갈라서자고 한다는군.”
“그럴 리가.”
이맛살을 찌푸린 김종인이 혼잣말을 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그런 이유로 여자가 갈라서자고 해?”
“이 자식은 중국에만 박혀 있다가 와서 그런지 여기 물정을 모르는군.”
혀를 찬 유종수가 아예 김종인의 귀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얀마, 누가 증거 잡히고 그러냐?
다 남편 약점 잡아놓고 내놓으라고 하는 거지.
봉규는 꼼짝 못하고 재산 쪼개줄 모양이더라.”
“시발, 세상 개판이구만.”
소주잔을 쥔 김종인이 길게 숨을 뱉고 나서 한모금에 마셨다.
“이게 뭐야? 우리 세대가 왜 이렇게 불안하게 살다가 가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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