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 황혼의 무도(13)
(1464) 황혼의 무도-25
가방을 챙겨든 오금주가 다시 김학술을 보았다.
“나, 갔다가 늦더라도 돌아올래요.”
“아, 시간이 몇신데.”
이맛살을 찌푸린 김학술이 힐끗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반이다.
오금주는 지금 딸 정미를 만나러 수원으로 가는 참인데 성남에서 가깝다고 해도
오늘 안으로 돌아오는 건 무리였다.
“가서 오랜만에 정미하고 자면서 이야기라도 하고 와.
당신 집 나가고 나서 걔 얼굴 한번도 못 보았잖아?”
김학술이 말하자 오금주는 시선을 내렸다.
그렇다.
1년7개월 동안이나 못 보았다.
언니 이야기를 들으면 정미 그년은 제 어미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22세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알콩달콩 살아야할 때에 결혼 4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고
두번인가 헤어진다고 별거를 했다 합쳤다 하는 형편이라 어미 생각을 하면 머리부터 아팠을 것이다.
거기에다 박서방은 작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잘리고는 지금 대리운전을 한다고 들었다.
김학술이 말을 이었다.
“돈은 꼭 정미한테 줘. 박서방 모르게 주는 게 나아.”
“알았어요. 그건 염려 마세요.”
오금주의 표정에 활기가 띠어졌다.
지금 오금주의 가방 안에는 1천만원짜리 수표 5장이 넣어져 있는 것이다.
거금이다.
정미가 결혼할 때 들어간 돈보다도 더 많다.
오금주는 김학술이 5천만원을 내놓으면서 정미한테 주라고 했을 때 놀라서 딸꾹질까지 나왔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도 시집간 딸한테 내놓지 않았던 김학술이다.
일년반동안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지 딱 열흘째가 되었는데 오늘 무도장에 다녀온 눈치였지만
전보다 말수가 더 적어진 것도 그렇다.
그러나 오금주는 예전의 덤덤한 상태로 다시 돌아왔다.
“그럼 다녀올게요.”
현관에 나온 오금주가 신발을 신으면서 전과는 다르게 김학술을 챙겼다.
“내가 오늘 못 오면 전화는 하겠지만 아침은 국 데워 먹어요.
밥은 오늘 저녁에 한 밥이 있으니까.”
“알았어. 정미가 좋아서 울겠네.”
오금주가 조금 들뜬 표정으로 집을 나갔을 때 김학술은 한동안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 일어섰다.
화장실에 들러 샤워를 하고 나온 김학술이 내복부터 갈아 입고는 오늘 무도장에서 입은 연미복을
다시 꺼냈다.
그러고는 거울을 보면서 정성스럽게 입었다.
얼굴에 크림도 바르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은 후에 겨드랑이에는 향수를 뿌렸다.
다시 거울을 본 김학술은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두번 울리더니 곧 응답 소리가 울렸다.
“예, 삼촌, 접니다.”
조철봉이 발신자 번호를 본 것이다.
“응, 난데, 너, 내일 바쁘냐?”
“아뇨, 바쁘지 않습니다. 삼촌.”
“그럼 너한테 부탁이 있는데.”
“예, 삼촌.”
“네가 내일 오전 9시쯤 지난번 그 박경택이하고 우리집에 와주지 않을래?”
“예, 가지요. 그런데 무슨 일로.”
“열쇠는 소화전 밑에 놓아둘테니까 너희들이 문열고 들어와서 기다려라.
네 숙모가 정미한테 갔는데 너희들이 먼저 와서 기다려야겠다.”
“예, 그러지요.”
“그럼 부탁한다.”
그러고는 김학술이 전화를 끊었다.
(1465) 황혼의 무도-26
다음날 오전 9시. 박경택과 함께 성남의 아파트에 들어선 조철봉은
응접실 전등에 목을 매단 김학술을 보았다.
김학술은 단정한 연미복 차림이었다.
마치 예감이라도 한 듯 조철봉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박경택이 당황해서 김학술의 몸을 부둥켜 안았다가 조철봉의 핀잔을 들었다.
“돌아가신 것 같다.”
잇사이로 말한 조철봉이 그제서야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시발. 그래서 우리가 숙모보다 일찍 와야 한다고 하셨구만.”
또 조철봉 혼자면 놀랄 것 같으니까 박경택까지 부른 것이다.
“경찰에 신고해.”
“예, 사장님.”
김학술의 시체를 내려놓은 박경택이 경찰에 신고를 할 적에 조철봉은 탁자 위에 놓인 편지를 보았다.
조철봉에게 남긴 김학술의 유서였다.
조철봉은 김학술의 시체를 옆에 두고 유서를 읽었다.
“철봉아, 나는 오늘 무도장에서 나는 것처럼 춤을 추었다.
새처럼 훨훨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추다가 감동을 하고 울었구나. 이런 일은 처음이다.
죽으려고 작정하니까 몸과 마음이 그렇게 가벼워진 모양이다.”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경찰에 신고를 마친 박경택이 조철봉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가 침대시트를 벗겨왔다.
그리고 김학술의 몸에 덮었다.
조철봉이 이어 유서를 읽었다.
“정미 엄마가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 난 죽을 생각을 했다.
정미 엄마가 예전의 모습을 찾아갈수록 그 결심이 더 굳어지더구나. 조급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지난 1년6개월 동안 진이 다 빠졌다.
나는 또 상처를 입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또 상처를 입는다면 그때는 죽을 기력마저 잃은 상태가 되어 있을 것이니까.
그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조철봉은 다시 머리를 들었다가 내렸다.
옆에 선 박경택은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다.
유서가 이어졌다.
“내가 병이 들어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정미 엄마가 어떻게 할 것 같으냐?
멀쩡한 남편 놔두고 도망간 여자가 제대로 밥이나 먹여 주겠느냐?”
그러더니 유서 글씨가 흐트러졌다.
마음이 격해진 증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만족한 상태에서 내 인생을 끝내려고 한다.
정미한테는 어제 정미 엄마한테 5천만원을 보내주었고 정미 엄마는 이 아파트하고
내 연금을 받게 되겠지. 내가 어제 누님 통장으로 5천만원 넣었다.
누님에 대한 내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니까 네가 잘 말씀드려다오.”
조철봉도 이제는 서둘러 마지막 장을 읽었다.
“철봉아, 내 몸은 지금 입은 대로 화장을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유서는 읽고 나서 바로 없애주기 바란다.
경대 위에는 정미 엄마 앞으로 유서를 한 통 남겼다.
너한테 신세만 끼치는구나. 외삼촌 김학술이.”
다 읽은 유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은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을 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참, 어머니한테 연락을 해야겠는데.”
정신이 난 조철봉이 박경택에게 말했다.
“숙모한테도 연락을 해야겠고.”
“예, 사장님.”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거칠게 울리더니
이쪽에서 나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경찰관 둘이 조철봉과 박경택을 보았다.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다음 계속>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437. 이래도 한세상(2) (0) | 2014.09.05 |
---|---|
436. 이래도 한세상(1) (0) | 2014.09.04 |
434. 황혼의 무도(12) (0) | 2014.09.04 |
433. 황혼의 무도(11) (0) | 2014.09.04 |
432. 황혼의 무도(10) (0) | 2014.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