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 황혼의 무도(12)
(1462) 황혼의 무도-23
다음날 오전 11시쯤에 김학술은 구리시 교외의 한식당에 앉아 있었는데
야외에 마련된 식탁 앞쪽으로 시냇물이 흘렀고 건너편은 수목이 울창한 산이었다.
음식맛은 둘째로 치고 풍광 때문에 손님이 꼬일 곳이었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주위 식탁은 비어 있었다.
오금주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다가왔을 때는 11시 정각이었다.
분홍색 원피스 차림의 오금주는 차분한 표정이었다.
이곳은 오금주의 언니가 사는 아파트에서 차로 20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김학술의 연락을 받은 오금주는 만날 장소를 이곳으로 정했는데
저도 처음인지 잔디밭에서 헤매다가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이쪽으로 왔다.
자리에 마주보고 앉았지만 둘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주문은 김학술이 했는데 메뉴판의 제일 뒤에 적힌 요리를 2인분 시켰다.
종업원이 돌아갔을 때 김학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 용건을.”
그러자 오금주가 식탁 위에 시선을 준 채로 금방 말했다.
“나, 돌아갈게.”
“어디로?”
“집으로.”
“왜?”
둘이 주고받는 말은 막히지 않았다.
김학술이 물었을 때 오금주가 머리를 들어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하고 살다가 죽으려고.”
“누가?”
그렇게 물었던 김학술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학술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운다.
오금주 때문이다.
일년반이다.
일년반 동안 오금주는 그놈하고 같이 살았다.
이런 말을 아무한테도 못했지만 540일 동안
그놈하고 절반만 뛰었다고 해도 270번,
1일 2회라면 540회, 한달에 10일이라면 180번,
거기서 2회면 360회, 이따위 계산을 최근까지 해왔던 김학술이다.
길게 담배 연기를 앞쪽으로 내뿜은 김학술이 연기 사이로 오금주를 보았다.
오금주도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다.
“그놈하고는 헤어진거야?”
“헤어졌어.”
“왜? 잠자리 맛이 시원찮아졌어?”
“그것도 있어.”
여기서는 김학술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다시 연기를 정통으로 오금주의 얼굴을 향해 뱉고 나서 김학술이 물었다.
“내 섹스가 시원찮아서 나간거냐?”
“그것도 있어.”
“그럼 왜 돌아오려는거야?”
“잘 알면서 그러네.”
“뭐야?”
눈을 치켜뜬 김학술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잇사이로 말했다.
“말장난 말고 대답해.
집 나간 건 너고 네 맘대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까.
돌아오려는 이유가 뭐야?”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순간 김학술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흠칫했다.
상반신을 세운 김학술이 오금주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담배도 손가락 사이에서 떨어졌다.
“뭐라고?”
갈라진 목소리로 김학술이 묻자
오금주는 똑바로 시선을 준 채 대답했다.
“사랑한다고 했어.”
“이 미친년이.”
“당신도 날 사랑한다는 거 알아.”
“이거 정신병원에 넣어야겠군.”
그러자 오금주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날밤, 당신이 복면을 쓰고 들어왔을 때, 금방 알았어. 내가 모를 것 같았어?”
곧 정색한 오금주가 말을 이었다.
“용서해줘. 다시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게.”
(1463) 황혼의 무도-24
“아이구, 오늘 빛나십니다.”
김학술의 모습을 본 이용근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그럴 만했다.
김학술은 검정색 연미복을 입었고 눈처럼 흰 셔츠에 나비 넥타이를 매었다.
검정색 구두는 반들거렸으며 몸에서는 은근한 향수 냄새가 났다.
다가온 선생들도 웃음 띤 얼굴로 김학술 주위에 둘러섰다.
“오늘 무도장이 환하겠는데.”
“오랜만에 정장 입으셨군요.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선생 하나가 물었으므로 김학술이 정색했다.
“오늘 제자 한 명 신고를 시키려고.”
“어, 어떤 제자기에 이렇게 신경을 쓰실까?”
이번에는 이용근이 물었을 때 교습소로 박선희가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박선희에게로 모였고 김학술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되었다.
박선희의 차림이 대답 대신이었기 때문이다.
박선희는 연두색 드레스 차림으로 김학술과 잘 어울렸다.
둘이 의상을 맞춰 입고 나온 것이다.
“선생님.”
다가온 박선희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김학술에게 말했다.
“멋지세요.”
“어이구, 눈꼴시어서 못 보겠네.”
나이 든 선생 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투덜거렸지만 곧 웃었다.
부러운 것이다.
김학술은 잠자코 박선희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건너 무도장으로 다가갔다.
무도장 경비 윤태권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부동자세를 취하더니
둘을 위해 정중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무도장 안으로 둘이 들어서자 곧 조용해졌다.
차차차 음악에 따라 춤을 추던 수백 쌍의 남녀가 입구 쪽에서부터 몸을 세우더니
파도에 밀려가는 것처럼 춤을 멈춘 것이다.
그러자 음악도 그쳤다.
김학술은 박선희의 손을 쥔 채 무도장의 중앙으로 다가갔다.
모두 둘을 위해 잠자코 길을 열어 주었고 곧 둘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원이 만들어졌다.
그때 음악이 울렸다.
삼바다.
김학술은 박선희를 리드하며 춤을 시작했다.
조금 긴장했던 몸이 풀리면서 음악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러자 주위의 남녀도 다시 춤을 시작했다.
그러나 둘을 위해 만들어준 원 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김학술은 몸이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가슴이 부풀었다.
춤은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기까지 하다.
남이 추는 춤을 볼 때보다 자신이 춤과 일체가 되었을 때
더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감동이 일어난다!
김학술은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음악실에서 김학술을 위해 지르박과 탱고, 블루스까지 틀어 주었으므로 마음껏 날 수 있었다.
그렇다,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마침내 김학술은 눈물을 쏟았다. 같이 날던 박선희가 그 눈물을 보더니
저도 감동해서 따라 울었다.
느낌이 전해지는 것이다.
춤을 시작한 지 30여년, 결코 춤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아름답게 살았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것이다.
얻은 것이 있으면 무언가를 잃는다.
다 욕심을 내면 안되는 법이다.
이윽고 김학술이 춤을 그쳤을 때 무도장에 모인 수백 쌍의 남녀는 일제히 박수를 쳤다.
환호성이 울렸고 떠들썩해졌다.
무도장 개설 이후로 이런 환성은 처음이어서 윤태권이 놀라 들어왔다가 저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박선희는 행복에 겨워 금방 죽어도 여한이 없는 표정이었다.
환호에 머리를 숙여 답례한 김학술이 상기된 얼굴로 박선희와 함께 무도장을 나갔다.
둘이 무도장 밖으로 나갈 때까지 박수는 계속되었다.
모두 감동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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